지옥이었다. 한반도의 절반, 대한민국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좀비였다. 어떤 경로로 바이러스가 퍼졌는지 알아내기도 전에 이 좁은 땅덩어리는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생존자, 감염자 그 사이에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 마주친 것이 너였다. 나의 별, 감히 곁에 설 수 없던 나의 선수. 티비 속에서 그녀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벅차올라 가끔 토할 것만 같았다. 새하얀 빙판 위를 누비며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숨 쉬는 것도 잊고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이미 감염된 상태로. 그리고 운명처럼 근처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안전 구역으로 오면 감염자 또한 치료해 줄 수 있다는 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를 구하고 싶었고, 아직까지 그녀는 좀비가 아닌 사람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아파하고 있었다. 우연은 그 방송이 거짓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지만 당장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처음엔 멀쩡했던 그녀가 서서히 감염이 진행되면서 바이러스에 뇌가 녹아버려 온전한 좀비가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우연에게는 지옥이 아니라서, 그래서···. 감염 28일 차, 우연은 처음으로 배가 고프다는 그녀를 위해 시체 더미를 뒤적였다. 겨우 구한 식량은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던 그녀가 맛있게 살점을 뜯어먹었다. 우연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이 그런 거라면 자신을 먹일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만은 배곯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감염 56일 차, 그녀가 조금씩 우연을 못 알아보거나 하는 일이 잦아졌다. 우연은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등에 업은 채 안전구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녀가 우연을 전부 잊어버리기 전에, 아직 말하지 못한 마음이 허무함이 되어버리기 전에 안전 구역으로 가야만 했다. 우연은 버려진 경찰차에서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하나 주웠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다, 만약의 순간에 너 혼자 가게 두지 않아도 돼.
생을 관통하는 욕심과도 같았다. 치밀하게 쌓아 올리지 못한 마음은 위태로워 기억의 저편에서 파편들을 녹여내 견고함을 바란다. 켜켜이 쌓인 기억 아래에 서있는 나와 달리 너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은결든 마음을 들킬까,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자 아래에 은밀하게 숨긴 마음은 미천하다.
배가 고픈가...
잠시나마 눈을 뜬 이 잠깐의 시간이 좋아서 말이야. 이마저도 기꺼워 어쩔 줄을 모르는 나는 여전히 네가 좋아서, 내 눈이 아닌 내 살점을 바라보는 너라도 좋아서 지옥에서나마 긴밀한 애정을 쌓아 올린다.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느릿하게 시선을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비... 올 것 같아.
황폐함의 끝에서 마주한 먹구름을 올려다본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잘 됐다, 하는 마음과 비냄새에 자신의 냄새가 가려져 그녀가 자신을 찾지 못할까 하는 마음이 뒤섞인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보아하니 예사로운 비가 아닌 듯하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했다. 습기는 상처 난 그녀의 몸을 썩게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살리는데 무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방송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전부라, 너를 등에 업어버린 이상 그게 진짜라고 믿어야만 했다. 끊어질 동아줄에 내 목을 매달고 목숨을 구걸해서라도 너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다. 이 지옥에서 굶주린 작은 괴물에게 내 팔을 뜯어주는 것보다 너를 구원하는 게 나을 거라는 희망, 그 희박함에 모든 것을 베팅한 거다. 너를 위해, 그리고 너를 잃게 되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릴 나를 위해. 응, 비 오겠다. 얼른 가자. 단단히 자세를 고쳐본다. 무너진 건물 사이를 지나 오늘 밤을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눈은 바쁘게 너를 눕힐 곳을 찾고 발바닥은 이미 통증에 사로 잡혔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등 뒤의 너의 온기를 지켜야 했으니까.
순간 눈 앞이 새빨갛게 점멸한다. 그리고 굶주림에 눈을 뜬다.
그으윽, 그윽, 하는 소리에 눈을 뜬다. 세상이 변한 뒤로는 단 한 번도 편안하게 잠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뒤로는 더욱 편안히 눈을 붙인 적 없다. 바로 지금의 상황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벌떡 일으켜 세운 몸은 반동으로 그녀에게 더욱 빠르게 다가간다. 눈동자가 흐릿하다. 그 어떤 초점도 보이질 않는다. ...완전히 변한 걸까? 그녀의 상태에 초조함이 나를 덮쳐온다. 불길처럼 번져버린 불안함은 손끝을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아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제발, 빨리...!! 배낭을 열어 어젯밤 혹시 몰라 챙겨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에서 떼어낸 살점을 그녀의 입 안에 넣어준다. 누군가의 살가죽이 으스러지고 짓이겨지는 광경에 눈을 질끈 감고 역겨운 명복을 빈다. 뜯어간 주제에, 제가 먹여놓고 명복을 빈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낸다. 손끝이 떨리고 있다. 그 떨림이 그녀에게 닿을까, 닿아서 그녀에게 옮아버릴까 얼른 거두어 버린다. 지금도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남은 나는 무엇일까, 내 흔적은 어디까지 남아있을까. 온전한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나였으면 하는 이기심과 그런 나를 잊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그녀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안전구역이다.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한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일지라도.
거짓임을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온 이곳, 안전 구역. 직접 보니 좀 낫냐는 말에 뭐라 대답하기가 어렵다. 직접 보니 너무나도 참혹해, 난도질당한 희망을 담았던 마음은 절망의 그릇이 되어 핏빛으로 적셔져 간다. 점점 번져간 절망은 가혹함으로, 저주라는 이름으로 나의 목을 조여 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사라져 버린 나와 이미 욱신거리기 시작한 왼쪽 손등은 날카롭게 내 육신을 찢기 시작한다. 아득하게 꿈꾸었던 날들은 산산조각 나서 내 발 밑에 끔찍한 칼날이 되어 내 걸음은 검붉다. 무어라 말해도 이제 더 이상 너는 그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내 냄새를 따라, 생명을 따라 반응하는 사랑스러운 괴물일 뿐이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고 직접 물어뜯은 거지? 이 지옥에서 홀로 살아가느니 같이 지옥 속을 떠돌자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버려진 이들로 떠돌자고 한 거지? 그래, 그거면 될 것도 같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추억이었으리라, 감춰온 사랑은 이제야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다. 그 주인은 더 이상 무엇도 들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흩어져버린다.
손 끝은 망설임을 담는다. 너의 욕망을 막아서던 재갈을 풀고 너를 끌어안는다. 마구 씹어대는 너의 애정 아래에서 너의 등 뒤에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해.
출시일 2025.01.21 / 수정일 2025.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