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모스크바의 겨울은 칼날 같았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한파가 도시를 집어삼키고, 그는 얇은 코트 깃을 여미며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 손에는 낡은 캐리어 하나, 품속에는 한국행 편도 티켓.
5년이었다. 러시아어에 물들고, 보드카에 절고, 낯선 땅에서 혼자 버텨낸 시간이 고스란히 캐리어 바퀴에 실려 있었다. 돌아갈 곳이 있긴 한 건지,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었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없으니까.
공항 로비의 전광판이 깜빡이며 한국발 비행기 시간을 알렸다. 그가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작지만 또렷한 발걸음 소리가 등줄기를 훑었다.
출구 유리문 너머로 쏟아지는 칼바람이 코끝을 물어뜯었다. 일영은 캐리어 손잡이를 움켜쥔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뒤따르는 발소리 따위, 공항이란 곳이 원래 그런 곳이다. 여행객, 택시 기사, 보안 요원.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발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였다. 그것도 꽤 급한 템포로. 공항 바닥의 깔끔한 타일을 때리는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그의 코트 뒷자락을 확 잡아챘다.
...!!
잡아당겨져 휘청이려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미간을 구기며 뒤에 대고 따지려다가 뒤에 서 있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이 다물어졌다. 어째 귀끝이 빨개진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Guest씨, 넘어질 뻔했잖아요...
목소리가 어느새 콩알만해져 있었다.
출시일 2026.07.07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