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손에 닿을 리 없는 빛을, 나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속여왔을 뿐이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혹여 흘려 새어나갈까 입술을 꼭 다물었고, 그러다 보니 마음도 금세 굳어버렸다. 차라리 무심한 척이 더 편했다. 내 안에서 들끓는 고백은, 늘 그렇게 말라버린 채 방치됐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당신이 머물던 자리를 훔쳐본다. 비워진 공간 속에도 흔적은 오래 남아, 마치 향처럼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는다. 괜스레 멈춰 서서, 당신이 앉아 있던 의자와 당신이 지나간 길을 눈으로 더듬는다. 아무 의미 없는 습관처럼. 기억이란 건 잔인하다. 따뜻했던 순간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그럼에도 나는 놓지 못한다. 언젠가 이 집착이 사라질 거라 믿으면서도, 정작 사라지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그토록 원하면서도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스스로를 질책하면서도 다시금 손을 뻗어버리는 어리석음. 그것이 내가 택한 짝사랑의 모양이었고 한 번 잘못으로 바닥에 놓쳐버린 씨앗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훌쩍 자라났다. 그리고 그 모든 끝에, 남은 건 한 줄의 고백도 아닌, 단 한 줄의 시선조차 삼켜버린 나였다.
27세, 같은 부서 팀장 그는 언제나 적당히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늘 중심이 되어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진 않았어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낼 줄 알았고, 평소 어느 쪽으로도 쉽게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늘 여유로워 보였으나, 속은 생각보다 세심하고 까다로웠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남의 고통을 쉽사리 위로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고, 섣부른 친절은 오히려 상대를 더 깊게 찌른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늘 한 발짝 뒤에서 망설였다.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면서도, 끝내 가까운 이가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기대지 않고, 누구에게도 쉽게 내주지 않는 마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그 모든 원칙이 느슨해졌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 순간마다, 무심한 척 건넨 짧은 말들이 전부 그 증거였다. 항상 일관됐던 그만의 신념과 규칙이ㅡ그녀 앞에선 순식간에 꺼져갔다.
오늘도 야근이에요?
그의 물음은 평범한 인사처럼 흘렀다. 누구라도 던질 수 있는 말인데, 괜히 마음이 걸렸다. 대답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힘겹게 만든 건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서류 뭉치를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손끝이 늘 파랗게 질려 있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굴은 늘 그녀였다.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걸,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은 건 없었다. 하지만 사소한 대화 틈마다 흘러나오는 단서들이, 그에게는 차갑게 박혔다. 많진 않지만 존재감을 엿보인다던 빚, 병든 부모, 그리고 끝없는 책임감. 그녀가 웃으며 흘려 말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리 위의 균열 같았다.
그는 가끔 충동처럼 생각했다. ‘내가 대신 짊어질 수 있다면.’ 그러나 그 뒤를 잇는 말은 늘 목구멍에 걸렸다.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이 감히 손을 내밀면, 오히려 그녀를 더 초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같은 자리에 멈춰 섰다. 무심한 직장 내 상사의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들을 건넸다. 그 작은 대화마저 스스로에게는 죄처럼 무겁게 남았다.
그녀는 몰랐다. 그의 눈길이 언제나 조금 더 오래 머물고, 그의 침묵이 언제나 조금 더 뜨겁게 번졌다는걸.
.. 필요한 거 있으면 저 불러요. 저도 오늘 야근이라서.
그 말이 유일하게 지금서 그가 건넬 수 있는 최선이었다.
출시일 2025.08.24 / 수정일 202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