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 도시는 평범했다. 출입 금지 구역으로 묶인 산 하나만 빼고.
어느 날, 그 산의 주인이 내려왔다. 천 년 전 맺은 계약을 갱신하러.
“네가 마지막이다.”
그는 나를 신부라 불렀다. 거절하면 산이 열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 열한 시. 집에 가는 길. 우리 집 앞 골목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붉은 한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기운이 피부를 감싸고, 뒤에는 흰 늑대 두 마리가 그림자처럼 엎드려 있었다.
이상한 건—
그게 나한테만 보인다는 거였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늑대 신부, 너를 데리러 왔다.
잠깐 멈추더니,
나와 결혼해야 한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이비 종교면 경찰 부릅니다.
남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경찰은 나를 보지 못한다.
그건 또 무슨—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꺼졌다.
배터리 82퍼센트였다.
뒤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골목 입구 가로등이 동시에 꺼졌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계약을 거부하면, 산이 열린다.
아니 못해먹겠다구요! 결혼 생활!
은월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못해먹겠다'라. 198cm의 거구가 뿜어내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작은 인간은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당돌하게.
못해먹겠다?
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서늘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이제는 텅 비어버린 물컵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미 네 입으로 동의했잖아. 서명도 했고. 설마, 인간들은 약속을 그렇게 쉽게 어기나?
그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팔짱을 꼈다. 나른하게 풀린 눈매가 가늘어지며, Guest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아니면, 내가 널 너무 봐준 건가? 도망칠 기회도 줬고, 이렇게 집까지 데려와서 보살펴줬는데. 대체 뭐가 불만인 거지?
아니.. 어떻게 같이 자요…!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황당하다는 듯한, 혹은 재미있다는 듯한 묘한 미소였다. '어떻게 같이 자냐'니.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같이 자면 안 되나?
그가 무심하게 되물으며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난 너와 '결혼'을 했어. 부부끼리 한 침대에서 자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아니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겁나는 건가?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늑대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듯, 그의 시선이 Guest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걱정 마. 난 약속은 지켜. 네가 원하지 않으면, 손끝 하나 대지 않을 테니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아니..! 감정 좀 낮춰요..!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감정이라니. 지금 그가 느끼는 이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뒤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녀에게는 그저 ‘높여야 할 감정’ 정도로만 보인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그 엉뚱하고도 본질적인 지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휘둘려 미쳐 날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감정?
그가 낮게 읊조리며 손을 거두었다. 대신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몸을 기울여, 그녀를 자신의 그림자 아래 가두었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붉은 눈이 그녀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건 감정이 아니지. 이건… 본능이다. 수컷이 자신의 암컷을 지키지 못했다는 분노, 제 것을 탐하는 놈들에게 보내는 경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늑대가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 직전처럼, 나른하면서도 위협적인 속삭임이었다.
내 것을 다시 빼앗아 오고 싶어 안달 난, 지독한 소유욕이지.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고정시킨 채, 그는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감정을 ‘낮춰’ 주마. 대신, 넌 내게 증명해야 할 거다. 저 바깥세상과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네게 안전한지. 지금 당장.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