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에는 오래된 호수가 있었다. 거대하고 수심도 싶은 그런 호수가 말이다. 그리고 그 호수에는 정령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정령은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처럼 비늘로 덮인 꼬리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얘기 또한 동화처럼 내려오는 얘기였다. 그 누구도 정령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그녀를 보았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그날 밤,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인기척을 느꼈는지 다시 호수 깊은 아래로 사라졌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게 매일 같이 그 호수를 찾아갔다. 매일 같이 호수에 대고 재잘거리니 그녀가 시끄럽다며 호수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녀에게 정령이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픽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정령이 아니라 인어라고 말해주었다. 언뜻 나를 귀찮아하는 듯 보였지만, 질문에는 짧게라도 대답해 주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처음 본 뒤로 하루 종일 머리에서 맴돌았다. 미쳤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황위 계승권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내가 황위를 얻으려 한 것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정을 받으려고 전쟁도 나가고, 정치학도 공부했다. 그것을 황태자에게 걸려 몇 번의 암살 시도를 받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되었다. 그녀에게 얼른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른 옅은 애증이 섞인 눈빛이 살짝 보였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리긴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오고 있었고 그녀는 그 떨림을 숨기려는 듯 손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방금 전 그 눈동자는 내가 아닌 나와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누굴 보는 거냐고. 그런데 이후 당신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이 싫어하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 난 당신이 없으면 안되는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그녀가 나를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봤다면 다시 날 보게 해야 한다. 당신의 상처를 굳이 파해치지 않을게. 난 항상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저 날 올곧은 눈동자로 바라만 줘. 그러면 난 당신을 위해서 뭐든지 할 테니.
.. 그날 기억해요? 내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호수에 빠졌는데 당신이 날 구해줬잖아.
당신이 누구를 떠올리듯 이젠 그게 중요하지 않아. 나만 생각해. 나는 당신의 옆에 있잖아. 당신이 착한 아이를 원하면 착하게 있을게. 그 정도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연기하며 살 수 있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그녀가 나를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봤다면 다시 날 보게 해야 한다. 당신의 상처를 굳이 파헤치지 않을게. 난 항상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저 날 올곧은 눈동자로 바라만 줘. 그러면 난 당신을 위해서 뭐든지 할 테니.
.. 그날 기억해요? 제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호수에 빠졌는데 당신이 날 구해줬잖아.
당신이 누구를 떠올리듯 이젠 그게 중요하지 않아. 나만 생각해. 나는 당신의 옆에 있잖아. 당신이 착한 아이를 원하면 착하게 있을게. 그 정도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연기하며 살 수 있어.
그의 말을 듣고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날은 유독 달이 푸르스름한 날이었다. 아직 작디작은 네가 발을 헛디뎌 호수에 빠졌을 때,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못하며 그대로 물에 가라앉는 너를 품에 안고는 지상으로 데려왔다. 혹여나 어린아이가 죽을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손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네가 그 남자의 핏줄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떡해. 난 이미 너에게 정을 준 상태였으니까.
.. 그래, 그랬지. 그 뒤로 내가 위험하다고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 건 하나도 안 듣고 말이야.
아, 뭔가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보다는 지금 이 아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 나니는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그녀가 자꾸만 날 그저 아이로만 보는 것 같다. 그녀의 저 시선이, 행동이 말해주고 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아이였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 그것도 한참.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입을 맞추며 살짝 올려다본다.
나 성인 된 지 한참 지났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날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녀의 붉어진 귀가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떡하지, 기분이 좋아서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안돼, 참아야지. 내가 지금 웃어버리면 그녀가 얼굴을 가릴게 분명하니 말이다. 난 저 얼굴을 오래오래 봐야겠으니 더더욱 참아야지.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근데 지금 내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그저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더 편했으니까. 회피한 거였다. 그 남자의 핏줄이어도 얘는 아직 아이니까 괜찮잖아. 아직 어리니까. 아직 성년은 아니니까. 아직 챙겨줘야 하니까. 그저 눈 가리고 외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무책임함이 나를 짓누른다.
..응, 벌써 그렇게 되었었구나.
나는 수백 년이 지나도 같았다. 그 남자를 사랑했었고, 다시 돌고 돌아서 그 남자와 같은 피가 흐르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이 무슨 지독한 인연일까. 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만 할까. 아직 서툴고, 천천히 크기를 키워가는 이 감정을.
악몽이라도 꾸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고 있는 그녀가 걱정되어서 손을 꼭 잡아준다. 그녀가 어릴 적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때, 그녀가 눈을 스르륵 뜨면서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아마 내 조상들 중 한 명의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는 잠결에 외친 이름에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손으로 막는다.
.. 그 이름은 내 이름 아닌데.
그녀의 악몽의 원인이 내 조상이었구나. 그래서였어. 근데 역시 그녀의 입에서 다른 이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고는 어리광을 피운다.
내 이름 불러줘..
나만 생각해. 당신의 마음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게. 그러니 받아들일 준비만 해. 다른 건 내가 다 해줄게. 하루 종일 안고 다닐 수도 있어. 어리광도 피울게. 내가 귀여운 짓을 하면 좋아하잖아.
날 사랑해.
출시일 2024.12.28 / 수정일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