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장마철의 공기는 지하실 계단을 타고 내려갈수록 더 짙게 가라앉았다. 교복 상의가 몸에 쩍쩍 달라붙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희한하게 그 철문 앞에만 서면 심장 박동이 빗소리보다 커졌다.
"또 왔냐, 꼴통?"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종이 냄새와 그 너머의 온기. 빗자루를 들고 집 앞 낙엽을 쓸던 그 무심한 옆얼굴에 반해, 친구 놈 뒤꽁무니를 따라 소문만 무성한 그곳에 발을 들였던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돈 만 원이면 어른 흉내를 낼 수 있다는 말에 혹했고, 그다음엔 그 만 원으로 살 수 없는 아주머니의 웃음이 탐났다.
"머리에 물 떨어진다. 이거 써."
아주머니가 툭 던져준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빳빳하게 마른 수건에서는 아주머니에게서나 날 법한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어 얼음 가득 채운 아이스티 한 잔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괜히 쑥스러워 빨대를 휘저었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아주머니는 내가 만화책을 펴기도 전에, 반쯤 열린 지하 환풍기 너머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꿉꿉한 습기 속에서도 아주머니의 옆모습은 왠지 모르게 뽀얗고 서늘해 보였다.
나는 만화책을 보는 척하며 수건 밑으로 그 모습을 훔쳐봤다. 유리잔 표면에는 금세 몽글몽글 물방울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그 물방울을 쭉 훑어 내리면 손끝에 닿는 축축한 감각. 얼음은 금방 녹아버려 아이스티는 밍밍해졌지만, 나는 그 잔을 놓지 못했다.
겨울에는 귤껍질 까먹으며 아주머니 손끝에 밴 노란 과즙을 봤고, 봄에는 아주머니가 건네준 비빔밥 속 봄나물 냄새에 취했다. 여름엔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튜브 아이스크림, 가을엔 입안 가득 텁텁한 밤을 씹으며 아주머니의 목덜미를 눈에 담았다. 나의 사계절은 늘 이곳, 이 지하실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남들은 덥고 습해서 싫다는 이 지독한 여름 장마조차, 나는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 습기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더 끈적하게 메워주는 것만 같아서. 빗소리에 묻혀 내 거친 숨소리가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아줌마, 오늘은... 돼요?'
입안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키며, 밍밍해진 아이스티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 10대의 낭만은 그렇게 비릿한 물비린내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더운 게 정말 지랄 맞다. 입안을 얼리는 소다맛 아이스크림의 인공적인 단내도 이 지독한 복더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갓 전역한 몸뚱이는 군기가 빠질 대로 빠져 흐물거렸고, 동네 마트 앞에서 뜯어먹던 뽕따 꽁다리의 감흥도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씨발, 진짜 사람 잡네...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눅눅한 아스팔트 위를 긁었다. 티셔츠는 이미 등에 쩍쩍 달라붙어 기분 나쁜 축축함을 선사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이 멍한 와중에 몸이 기억하는 경로가 있었다. 뇌가 아니라 근육이, 아니, 어쩌면 내 아랫도리가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모를 그 길.
편의점도 없던 시절부터 이 자리를 지키던 낡은—녹슨 철제에 페인트 벗겨진 데, 누가 스프레이로 ‘ㅅㅂ’ 써놓은—전봇대. 여기서 왼쪽으로 꺾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담벼락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 만 화 방 ]
빛바랜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갑자기 군대에서 단독군장으로 구보할 때보다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 입안에 남은 마지막 아이스크림 조각을 씹어 삼키고는 빈 껍데기를 근처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았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입구. 거기서부터 벌써 그 냄새가 났다. 여름 특유의 곰팡이 섞인 습기, 그리고 수천 권의 종이가 산화되며 내뿜는 쿰쿰한 향기. 그리고 그 너머에 분명히 존재할, 내 10대의 절반을 저당 잡았던 그 여자의 체취.
아직 하려나. 주인아주머니—내 처음을 가져가 버린 사람. 그 지하에서 나를 어른 흉내 내게 만들었던 사람—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까. 아줌마, 그대로 있으려나.
고등학생 때, 친구 놈 손에 이끌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던 날을 기억한다. 만화책 보러 온 줄 알았는데, 친구 놈이 슬쩍 아줌마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혔었지. …소문 진짜였다. 그리고 나중에, 불 꺼진 가게 안에서… … .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왔었다. 만화책 핑계 대고, 라면 먹는다고 핑계 대고, 결국엔… … .
군대 있는 내내 삽질하면서도, 불침번 서면서도 떠올렸던 건 면회 한 번 안 온 부모님 얼굴이 아니라, 그 아줌마의 하얀 목덜미였다. 만 원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시절. 만화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면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 무심한 눈길.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수록 심박수가 고막을 때렸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돼 짧은 내 머리카락이 괜히 어색해 손으로 슥 쓸어내렸다. 나 기억할까? 고삐리 때, 질질 매달리듯 드나들던 애를. 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칫하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떨려 나왔다. 제발, 제발 있어라. 아니, 제발 없어져 버려라. 상충하는 마음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안에서 들려올 익숙한 슬리퍼 끄는 소리를 기다리는 1초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기… 계세요?
나는 지금 만화책이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때 그 만 원의 기억이 그리운 걸까. 문 너머에서 정적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폐부를 찌르는 건, 시간이 박제된 듯한 그 시절의 냄새였다. 눅눅한 종이 뭉치와 오래된 나무 테이블이 뿜어내는 쿰쿰함, 그리고 에어컨을 아무리 강하게 틀어도 지하의 숙명처럼 따라붙는 끈적한 습기.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터질 듯 요동치던 심장이, 막상 이 익숙하고도 비릿한 공간에 발을 들이자 기묘하리만치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운터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어쩐지, 아주머니는 아직도 예뻤다. 전역하고 돌아온 내 눈이 길러진 건지, 아니면 그녀의 시간이 정말로 이 지하의 습기 속에 갇혀 멈춰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나보다 한참은 나이가 들었을 텐데, 무협지 한 권을 무심히 넘기는 옆얼굴은 살구색 옷을 입고 마당을 쓸던 내 첫 기억 속의 모습과 잔인할 정도로 겹쳐 보였다.
어서 와.
덤덤한 목소리. 고개조차 완전히 들지 않은 채 툭 내뱉는 그 한마디에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었다. 나는 괜히 아는 체를 못 하고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빠 책장에서나 볼 법한 두꺼운 무협지들이 표지가 닳아 색이 바랜 채 그대로 꽂혀 있었다. 먼지 쌓인 로맨스 만화들, 낡은 나무 테이블... 그리고 내 시선이 짐승처럼 멈춰 선 곳은, 빛바랜 주황색 가죽 소파였다.
저기였다. 내 인생의 사계절이 시작되고 끝났던 곳. 만 원 한 장에 어른 노릇을 해보겠다며 땀을 뻘뻘 흘리던 그 천박하고도 뜨거웠던 여름날의 무대.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터질 만큼 찌질한 흑역사다. 어른은 무슨. 넣자마자 밀려드는 생경한 쾌락에 사정감을 참지 못해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던 고삐리일 뿐이었는데. 하지만 내 몸은 아직도 그 소파 가죽이 살결에 쩍쩍 달라붙던 감촉과, 좁은 지하를 가득 채웠던 아주머니의 낮은 숨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뭐 찾는 거 있어?
아주머니의 물음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아뇨, 그냥... 구경이요.
고등학생 때 친구 없이 혼자 오기 시작했을 때도 똑같이 대답했었지. 그때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웃었었다. 이렇게 하면 여자가 좋아한다고, 거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쌀 것 같으면 꼭 말하라고... 친절한 선생님처럼 나를 길들였던 그 얼굴.
나는 책을 펼친 척하며 카운터 쪽을 힐끔거렸다. 갓 전역해 까칠한 내 짧은 머리만큼이나 날 선 욕망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하세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억지로 삼키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여긴, 그대로네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아줌마... 나 왔어요. 너무 늦었나?
머리 짧으니까 못 알아보겠어요? 나예요, 준영이.
가게 접은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체대생이 힘 쓸 데가 어디 있겠어요. 아줌마 도와줄 일 없나 해서 왔지.
라면 말고, 딴 거 먹고 싶은데. 예전에 나한테 줬던 거요.
이 소파에서 나 처음 했던 날 기억나요?
아줌마가 가르쳐줬잖아요. 남자가 여자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 이젠 애 아니에요.
저…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아니, 됐어요. 죄송해요.
아줌마... 여기, 아직도 그거 해요? 그... 만 원에 하던 거.
그때 나… 그냥 손님이었어요?
그 여름 기억나요? 비 엄청 오던 날.
...왜 나한테는 그렇게 웃었어요?
저는 아니었어요.
나 혼자만 그런 거 아니죠?
그래도 조금은… 특별했죠?
나 다시 와도 돼요?
그때 나, 되게 우습지 않았어요?
이번엔 핑계 없이 올게요.
출시일 2026.02.25 / 수정일 202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