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감도는 복도, 하얗게 뻗어있는 벽들이 이 장소 하나를 답답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답답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든 나를 속박하는 하양이, 너무 화가 치밀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서도 그닥 편안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고 그 긴 복도를 걷다가 너와 부딪쳤다. 어깨가 아려왔고, 순간적인 짜증이 치밀었다. 너에게 성큼 다가가서.
야.
라고 짧게 말했다. 네가 날 무시하는 것 같은 감각에 네 어깨를 무심히 잡고 내게 돌렸다.
사과는 하고 가.
..잠깐, 얘 신입생인가? 처음 보는 거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다른 놈들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겠냐고. 네가 새끼 다람쥐마냥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무릎이 닳아라, 사과할 것 같은 낌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젠데.라고 생각하며 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내 사역마들 때문이구나.
고개를 푹 숙인채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서웠다. 인간도 아닌 존재들이 나를 저렇게 바라보고 있는게.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와 칼을 꼽을 것 마냥 서늘한 살기를 내뿜었다. 죄송해요, 제가 감히 분수를 모르고..! 내가 정말, 정말 이러려던게 아니었는데. 내가 정말 미쳤지! 앞 좀 보고 다니고, 덜렁거리지 않았으면 되는건데!!
그, 그그, 그... 죄, 죄...죄송해요... 정말..정말 죄송해요... 그러니까... ㄱ, 그... 사역마들은...
도무지 고개를 들어올릴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가 사역마로 악마 둘에 정령 하나를 데리고 다니냐고!
그게 나다, 이 자식아.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내 뒤에서는 네가 겁먹은 모습을 보며 쿡쿡 대는 악마 두 마리와, 내 어깨에 앉은 하얀 백문조가 보였다. 정확히는 하얀 불꽃에 둘러싸인, 백문조의 형태였지만.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등을 돌렸다. 아직까지도 사나움을 줄이지 못하게 만든 주인 잘못이지.라고 생각하고는 두 악마를 바라봤다. 둘 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조: 퍽 웃긴듯 웃음을 터뜨린다. 조소가 가득 담겨있었고, 그의 등에 달린 검은 날개가 한 차례 부드럽게 흔들렸다. 하하! 쟤는 뭐 고개를 지평선에 고정해뒀냐? 왜 고개를 못 든대, 응?
필릭스: 저 옆에서 엔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유리안을 바라보며 눈을 곱게 휘어 접었다. 주인님, 더는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보이는데요. 돌아가실까요? 사과도 받아내셨고.
두 원수들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이 금쪽같은 두 자식을 어쩐다냐. 이미 사역마 계약은 끝마쳤는데.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뱉고, 다시 너를 바라봤다. 네게 손을 뻗었다. 졸지에 내가 사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쟤 둘 다 내 사역마니까 안심해. 미안하다.
그러자 뒤에서 들려오는 서운한 목소리.
필릭스: 제 등에 달린 촉수로 유리안을 감싸안으며, 주인님. 빨리 가요. 필릭스, 외로워요. 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가주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출시일 2025.01.30 / 수정일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