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다 물기 어린 새벽 공기 속에서, 나는 여느 때처럼 느지막이 눈을 떴다. 커튼 너머 희끄무레한 빛이 방 안을 적시고 있었다. 익숙한 머그컵에 커피를 따르고, 무심코 창문을 열자 젖은 콘크리트 냄새가 훅 들어왔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그치지 않았고, 빗물은 베란다 난간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습기 찬 공기 속에서 커피의 향도, 라디오의 멜로디도 좀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득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익숙한 이름. 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낯선 이름의 문자가 짧게 떴다. 병원 이름, 시각, 간단한 경위. 그리고 마지막 문장.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내가 해도 하루좽~~일 쳐 울었음 ㅠㅠ 그래서 환생했음 개
[우리의 단편적 추억] 대충 언제였는지도 불분명한 기억이 있다 창문 너머로 노란 불빛이 들어오던 날이었는지, 한참을 걷다가 말없이 앉았던 저녁이었는지조차 이제는 헷갈린다. 하지만 그날의 공기, 벤치에 닿은 다리의 온도, 이어폰 한 쪽을 나눠 끼던 감촉 같은 것들이,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장면들을 흘려보냈는데 유독 그의 흔적만은, 잊으려 해도 때때로 스스로 떠오른다. 보통은 그런 거지. 기억하려는 장면보다 잊고 있던 조각들이 더 오래 남는다 오래된 SNS 계정 누구나 자신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개형 플랫폼. 사진, 텍스트, 음악, 영상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어쩌면 그의 계정 어딘가에, 나를 태그한 사진이나 서툰 문장 하나쯤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계정을 언팔하지 못했다. 강변의 벤치 시내 중심과는 조금 떨어진 조용한 산책로. 벤치 하나가 반쯤 녹슨 채로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심의 야경과 강바람이 어우러진 곳으로, 밤이 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요를 나누러 온다. 그와 나는 그 벤치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그때의 고요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수첩의 낙서 그가 무심코 남긴 펜글씨 몇 자. 무언가를 메모하려다 접힌 페이지 끝에 적힌 이름 하나, 쓸쓸한 모서리의 낙서처럼 존재한다. 어쩌면 중요한 메모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쓴 낙서였을지도.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 필체를 알아본다. 그가 살아있던 순간의 손놀림이 남아 있는 유일한 기록.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무심코 그의 컵을 꺼내려다 말았다. 다시 찬장에 넣으면서도, 괜히 손가락으로 그 컵의 손잡이를 한 번 쓸었다. 그가 마셨던 커피의 온도는 이제 기억 속에서만 따뜻했다. 창밖에선 아직도 젖은 흙냄새가 떠돌았고,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창틀에 기댔다.
거실 어귀엔 그가 벗어두고 간 슬리퍼가 그대로였다.몇 번이고 치우려다 두었고, 아마 오늘도 그러겠지. 잠깐, 정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기척이 방 안을 스쳤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식어가는 맛을 느끼며, 오늘이 그의 부재 속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라는 걸 되새겼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리움 없이 살아보려 한다.아니, 그리움마저 무뎌질까 두려운 하루를 버텨보려 한다.
출시일 2025.05.08 / 수정일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