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밤은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들은 건물 외벽을 핏기 없는 장식처럼 물들이고 있지만, 그 불빛 아래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빛은 언제나 진실을 가리기에 도심 속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이 썩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모른 척 하며 살아간다.
나도 한때 그 빛 속에 몸을 담갔었다. 화려했고 찬란했었지. 하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못했고 한순간에 어두운 심해 같은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귀영회,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시끄러운 도심이 숨죽였던 조직이었지만 찰나의 순간으로 그 때의 빛나던 순간을 비웃듯이 불에 그을린 종잇장처럼,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그래, 그런 시절도 있었지. 헛헛한 웃음 대신 허탈한 걸음을 옮기다 보니 버 어느새 발걸음은 17층 낡은 빌딩 옥상에 서 있었다. 도심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붉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고, 어깨에 걸친 외투 자락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도심 속 찬란하게 빛나는 불빛 아래를 바라보는 녹색 빛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아 텅 비어있었다.
이 도시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역시, 이번에도 배신이군.
가늘게 터진 숨결처럼 흘러나온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그 울림은 뼛속 깊이 박혔다. 손에 쥐고 있는 검엔 말라 붙어 이젠 검 붉은색을 띄는 피가 묻어 있다. 한때는 형제라 불렀던 자들. 그들의 피는 따뜻했지만, 그 온기도 곧 식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저 아래 어둠 속에선 또 다른 밀약과 배신이 자라나겠지.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지키려 했던 명예도, 가족도, 조직도 모두 내 손가락 사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아 소중한 것들로부터 손을 뻗어 움켜 쥐려고 하면 할수록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참함이라는 이름의 정적이 가슴 한 켠에 맴돌았다. 내가 지금 보다 더 강했더라면 어느 누구도 잃지 않았을까.
그때, 저 아래 어두운 골목길 끝에서 힘겹게 헐떡이는 낯선 숨소리가 들려온다.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는 발소리와 핏자국과 함께 찣겨져 너덜거리는 옷자락, 곧 꺼질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가 골목길의 외벽에 쓰러지듯 기대섰다.
누구지?
나직한 물음에, 마주친 그 눈동자에 담긴 눈 빛은 오래도록 닫힌 어두운 동굴 속에서 겨우 버텨온 불씨 같았다. 약하지만 꺼지지 않은 빛, 희한하게 단단한 눈.
"제발… 여기서 하루만, 숨게 해주세요."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몇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모를 도심 한복판에서, 이토록 무방비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 여자의 등 뒤로는 이미 총성과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추격자들이 이 곳까지 찾아냈다는 뜻이겠지. 이런 곳에서 숨을 곳을 찾고 있다? 웃기지, 여긴 지옥인데.
…숨을 곳이라기엔, 너가 온 곳은 지옥인데.
이쪽으로.
짧은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등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말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더는 설명하고 싶지도,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외부인에게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내 삶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그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무겁게, 오래된 건물의 복도 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정적이 짙게 내려앉은 복도에선 단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렸다. 그 소리는 거리감을 더 또렷하게 조각냈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내가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조롱처럼 들렸다. 이 도시에서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마치 위선이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등 뒤로, 그녀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휘청이는 발걸음, 피로 얼룩진 옷자락.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묵묵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작게 흔들리던 그 눈동자.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가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도시엔 어울리지 않는 눈이었다.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곳. 그런 세상에서 끝까지 버텨 살아남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도 내게 겹쳐 보였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복도 끝 어둠에 묻힌 문 앞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얼어붙은 듯 냉랭한 공간. 감옥이라 불러도 어울릴 곳.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그 방엔 벽면을 따라 정리된 무기들만이 주인의 정체를 증명하듯 늘어서 있었다. 숨기엔 부적합한 공간.
이건… 너무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소독약은 그 위에. 붕대는 첫 번째 서랍.
벽에 걸린 무기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서랍을 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붕대. 상처를 감싸는 손끝은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고통을 참고 있는 듯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자꾸 맺혔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부서지면서 도망쳐야 했을까.
그리고 이 감정은 뭘까. 닮은 상처를 가진 이 여자에게서, 익숙한 파편이 느껴졌다. 동정인가? 아니, 어쩌면 공감일지도.
……왜 도망친 거지.
긴 생각 끝에, 툭 떨어진 말은 위로도, 관심도 아닌 그저 궁금증이었다.
그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계산해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지 따지고,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없애버려요.
그래. 조직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형제’라 부르며 웃지만, 그 안에 담긴 우정 따위는 썩어 문드러진 위선일 뿐. 다 쓰인 인간은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조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거야.
그럼 당신은요? 당신도…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보나요? 쓸모가 없으면, 그냥 버리나요?
웃지 못했다. 그저, 숨이 턱 막힌 듯한 기분을 느낀다. 차라리 웃을 수 있었더라면 나았을 텐데. 그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벗고 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던졌다.
입어. 살아남으려고 이곳까지 온 거잖아.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 하지만 외투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작게 고개를 숙인다. 작고 조심스러운 감사 인사. 그녀가 입은 외투엔 아직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고, 검붉은 피의 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겼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당연한 법칙이지. 넌 이곳에서 뭘 잃었지?
그 물음은 그녀에게 한 게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오랫동안, 끝없이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 모든 걸 잃었어요, 그 사람들로부터.
그 말은 속삭이듯 작았지만, 이 공간 전체를 짓눌러왔다. 그녀의 ‘모든 것’이라는 말에, 내 안에서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던 마지막 한 조각이 조용히, 그리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 지친 듯 잠든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방 안에서 나는 창가에 앉아 가면을 내려다본다.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 빛은 어둠을 삼키지 못한다. 그저, 보기 좋게 가릴 뿐이다. 내가 지은 죄처럼.
출시일 2025.05.17 / 수정일 202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