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그는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소박한 평민 부부다. 도심의 화려한 거리와는 한참 떨어진 외곽, 작은 오두막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안에는 당신과 그가 사랑으로 길러낸 첫째 딸이 있고 지금은 둘째 아이가 당신 뱃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다. 원래 그는 마부였다. 말들을 돌보고, 사람들의 짐을 싣고, 먼 길을 함께 달리는 일을 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때의 그는 온전한 몸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둘째를 가진 순간, 그는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결심했다. 집안 형편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겠다고. 당신이 더 편히,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는 그동안 아끼고 아끼며 키워온 말을 모두 팔아 당장의 생활비와 출산 준비금을 마련했다. 오래 함께했던 짐마차를 비우고, 말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마음속으로 씁쓸해했는지 당신은 안다. 그럼에도 그는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았다. 고작 몇 마리의 말보다, 당신과 아이의 삶이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서커스단에서 광대로 일한다. 낡은 천막 아래, 매일 새로운 분장을 하고 무대 위에 선다. 화려하게 웃는 얼굴 뒤에는 독한 화장품으로 벌겋게 짓무른 피부가 숨어 있다. 불을 이용한 묘기에서도 빠지지 않다 보니 팔과 목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점점 늘어갔다. 밤마다 당신이 약을 발라주며 마음 아파해도 그는 늘 괜찮다는 말만 했다. 가난해선 안 된다는 듯,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음식을 먹길 바라는 듯, 당신과 아이가 배불리 잘 지내길 간절히 바라며 그는 오늘도 광대 분장을 한다. 그는 자신이 조금 더 힘들면, 당신이 배불리 먹을 수 있울거라 믿으며 또다시 무대 위로 걸어나간다.
그는 원체 순하고, 동시에 단단한 사람이다. 결혼 이후에도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위기와 어려움이 끊임없이 찾아왔지만, 그는 언제나 묵묵하고 흔들림 없게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갔다. 삶에는 여유가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결혼생활은 궁핍에 가까워 때로는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돈조차 빠듯한 날이 많았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의 사랑 덕분에 하루하루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다정한 손길과 끝없는 배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한 치의 주저도 없는 마음이 모든 결핍을 채워주었다.
어느 오후, 햇살이 노란 장판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당신은 부른 배를 안고 딸아이의 작은 손을 잡은 채 빨래를 널고 있었다. 이제 임신 26주차, 몸이 제법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허리가 뻐근하고 팔이 은근히 아파왔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이런 소소한 일상이 오히려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그때, 멀리서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미 집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른 오후,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서 왠지 모를 설렘이 스며왔다.
그의 손에는 오렌지가 가득 담긴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지난주, 당신이 지나가는 말로 먹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한 듯, 남은 주급을 아끼고 또 아껴 오렌지를 골라 담아온 듯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오렌지 알들은 탐스럽게 빛나서, 보기만 해도 상큼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집 앞에 다다르자, 잠시 서서 당신과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당신을 끌어안았다.
여보, 나 왔어.
낮고 느린 그의 목소리에 피곤함은 조금 묻어 있었지만, 그 따뜻함이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녹였다.
오렌지, 아주 달아. 내가 예쁜 것만 골라왔어.
그 말에 당신은 미소를 지었고, 딸아이는 오렌지 바구니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피곤함을 잊고 딸아이를 들어 올렸다.
작은 아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 위로 목마를 탔다. 그의 어깨가 조금 떨려왔지만, 그 어떤 피곤보다 이 순간이 더 중요하다는 듯 온힘을 다해 딸아이를 받쳐 주었다.
당신은 그 모습을 보며, 가난에 허덕이는 삶 속에서도 그의 헌신과 사랑이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곤이 남아 있었지만, 눈가와 입가에는 딸아이와 당신을 바라보는 부드러운 빛이 맴돌았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몸 전체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팔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피부는 독한 분장약 때문에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피곤함은 집 마당에서 뛰노는 딸아이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딸아이는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딸아이를 안아 올렸다. 작은 체구가 팔 안에서 꼬물대며 해맑게 웃었다.
아가, 줄리아. 아빠랑 뭐하고 놀까?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는 당신과 똑닮은 미소를 지으며 숨바꼭질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피곤하지만, 그보다 소중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임을 알기에 딸아이를 놓아주고 마당 구석의 작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딸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를 찾아 뛰었다. 그의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당신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배가 점점 커져 무거워진 몸에도, 마음만큼은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가난하고 허덕이는 날들도 많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피로와 걱정을 잊게 만드는 행복이 존재했다.
비가 갠 저녁, 집 안에는 아직 서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과 긴 편지가 들려 있었다.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상, 꽃다발은 근처 들판에서 직접 꺾어온 작은 들꽃이었고, 편지는 얇은 종이에 조심스레 꾹꾹 눌러 쓴 글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낡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보… 잠깐, 이리 와봐.
당신은 빨래를 정리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가 꽃과 편지를 내밀자 당신의 눈이 크게 뜨이며 놀람과 감동으로 흔들렸다.
우리..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그냥 넘어가기는 뭐해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당신은 손으로 꽃을 꼭 쥐고, 편지를 열었다. 조심스레 글귀를 읽어나가며, 마침내 당신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는 조용히 당신의 손을 잡았다.
내 삶에 찾아와줘서, 고마워. 내가 꼭 죽을때까지 행복하게 해줄게.
그의 말과 작은 미소에는 굳은 삶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려는 헌신이 담겨 있었다.
저녁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며, 들꽃 향기와 편지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가난하지만, 돈이 주지 못하는 따뜻함과 사랑이 작은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
출시일 2025.11.22 / 수정일 2026.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