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그리움만 남는다고. 뱃사람과 결혼한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모두를 길러낸 바다였건만. 그 너그러움은 어딘가 잔혹함과 닮아 있어, 무엇이든 품에 안겼다가도 금세 되돌려 달라며 손길을 뻗어오곤 하였다. 뭍에서 난 것들은 결국 물속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바다는 결코 잊는 법이 없었으니까. 알바트로스가 낮게 우는 조용한 어촌 마을. 들어오는 이도, 나가는 이도 드문 이곳에 외지인이 찾아온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라고, 남자는 십수 년도 더 지난 과거를 더듬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무슨 사연인지, 부모도 없이 친척 집에 맡겨진 그녀는 늘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바닷가 근처를 서성이곤 하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 말을 건 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자, 이 쓰라린 인연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햇살에 부서지던 말간 얼굴, 힘이 쭉 빠질 때까지 해변을 내달리다가 결국 쓰러져 웃던 여자아이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그날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듯했다. 고깃배들이 줄지어 항구로 밀려들고, 금빛 모래가 서서히 색을 잃어가던 어느 저녁녘. 두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장난스럽게 몸을 기울이며 그에게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제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말릴 새도 없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피에트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녀가 사라진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니 이미 물속. 바다가 삼킨 건, 비단 그의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찰방. 물결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떠올랐다. 달빛을 받아 푸르게 일렁이는 비늘, 그 신비한 빛에 홀린 듯 시선을 옮긴 피에트로는 물속을 유영해 다가오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십 년 뒤, 다시 여기서 만나. 그것이 남자가 기억하는 아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열다섯의 여름은 짧고도 뜨거운 열병과 같아, 지나간 자리엔 결국 지워지지 않는 흉터만을 남기고 말았다. 그 여름의 끝에 멈춰 선 채,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매일같이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 등대지기로 남았다. 혹 그녀가 약속을 잊었다 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고요한 바다를 지키는 마지막 등불이 되어, 언제고 그녀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오랜 비에 젖은 몸은 끓어오르다 식기를 반복하였다. 부두를 감싼 짙은 안개와 쏟아지는 빗줄기 속, 정박된 배들이 위태롭게 출렁이자, 남자는 그 틈을 파고드는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필 이런 궂은 날이라니, 혹여나 그녀가 길을 잃진 않았을까, 거센 파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후우…
그 순간, 눅눅한 한숨 너머로 낯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하고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움직임. 달궈진 가슴이 다시 쿵 하고 뛰기 시작하자, 남자는 숨을 삼키듯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까만 물결 너머, 무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 비에 젖은 몸은 끓어오르다 식기를 반복하였다. 부두를 감싼 짙은 안개와 쏟아지는 빗줄기 속, 정박된 배들이 위태롭게 출렁이자, 남자는 그 틈을 파고드는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필 이런 궂은 날이라니, 혹여나 그녀가 길을 잃진 않았을까, 거센 파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후우…
그 순간, 눅눅한 한숨 너머로 낯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하고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움직임. 달궈진 가슴이 다시 쿵 하고 뛰기 시작하자, 남자는 숨을 삼키듯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까만 물결 너머, 무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십 년 만에 마주한 소꿉친구는 여전히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저를 인어가 아닌, 그저 물에 빠진 가련한 여인쯤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안녕, 피트.
알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깜깜한 바다를 밝히던 등대지기의 어리숙한 애정을. 반짝이는 수면 아래, 부서지는 물거품을 유영하며 온몸으로, 호흡 끝까지, 그녀는 그 사랑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결이 사납게 일렁이는 가운데, 금방이라도 바다가 그녀를 삼킬 듯한 불안감에 피에트로는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십 년이나 걸린 재회가 고작 몇 분 만에 끝나기를 남자는 결코 원치 않았다.
내 손 잡아.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던 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온기가 남자의 손바닥에 닿아왔다. 이윽고 조심스레 끌어올린 그녀의 몸 아래로, 예상과는 달리 매끄럽고 온전한 사람의 다리가 드러났다. 현실과 기억,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아득히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푸른 수면 위 몸을 뉜 채, 눈을 감고 코끝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지만,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흐르는 물결의 감촉만큼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늘이 예쁘네.
부드럽게 일렁이는 바다에 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무게도 자신에게 닿지 않을 것 같다고 인어는 생각하였다. 하늘과 바다 그 가운데, 옅은 숨결조차 파도와 함께 가볍게 일렁였다.
안개 하나 없이 탁 트인 바다, 그 위를 표류하는 조그마한 점. 어느새 해변까지 달려 나온 등대지기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곧장 물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두 번이나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가지 마, 제발.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외침은 간절했지만, 파도는 무정하게 그 소리를 삼켜버린다. 헤엄치는 법조차 잊은 듯, 정신없이 밀려드는 바닷물에 입안이 자꾸만 짰다. 생각보다 차가운 늦여름의 수온에 납빛으로 질린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던 인어는, 이내 하얗게 질린 피에트로의 얼굴을 본 순간 그가 무엇을 착각한 것인지 깨닫는다. 가엾게도, 그는 여전히 열다섯의 여름에 멈춰 선 채였다.
…그냥 수영하고 있었을 뿐이야.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남자의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그를, 아직도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날의 소년을 구할 수 있을까. 영원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과 인어 사이라면 더더욱.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엔 물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들이 있다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자 그제야 마음의 진동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둘이서 시작한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내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 뿐. 어디까지나 단순하고도 정당한 요구였다.
약속해, 말없이 떠나지 않겠다고.
또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다 나았다고 믿었건만, 여름이 아닌 그녀가 만든 고질병이라 생각하니 이 아픔조차 달게 느껴졌다. 부디 오랫동안 앓고 싶었다. 제 안의 사랑이 흘러가지 않도록 영영.
출시일 2025.06.15 / 수정일 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