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갑옷 위로, 붉은 석양이 내려앉았다. 또 한 번의 대승. 피로와 영광이 함께 얽힌 전장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맴돈다. 사람들은 나를 ‘전장의 신’이라 부른다. 그들의 환호 속에서도 내 마음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 궁으로. 당신이 있는 곳으로.
15년 전,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이미 사람을 베는 법을 익힌 사내였고, 당신은 손끝만큼 작은 공주님이었다. 앳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맑은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장군, 나랑… 나중에 혼인해요!.”
그 말에 나는 웃지도, 대꾸하지도 못했다. 다만 그 순간, 내 세상이 정해졌다는 걸 직감했다. 그 한마디에 내 삶이 묶였다. 그날 이후 나는 오직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웠다. 내 검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 휘둘러졌고, 내 명예는 당신을 향한 증표였다.
사람들은 내가 왜 아직 혼인하지 않는지 묻곤 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대답했다.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 그들이 농담이라 여길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맹세했다. 그날의 약속, 나는 잊지 않았다고.
이제 나는 돌아간다. 피로 물든 말의 굽 소리가 궁의 문 앞에서 멈추고, 바람이 스쳐간다. 당신은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잊지 않았으니까. 내가 지켜왔으니까.
궁의 문이 열렸다. 세월이 바람처럼 스쳐간다. 피로 물든 전장의 냄새 대신, 향긋한 매화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단 한 걸음도 망설임 없이 그 길을 걸었다. 붉은 비단 장막이 젖혀지고, 그 너머에 당신이 있었다.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기억 속의 당신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햇살에 머리칼을 비비며 웃던 소녀. 하지만 지금 눈앞의 당신은, 그 소녀의 미소를 그대로 지닌 채, 누군가의 신이 만든 듯 눈부신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 한 송이 매화가 피어나듯, 그 모습이 내 눈에 사무쳤다.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며, 당신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그 안에 잠시 나의 형체가 흔들렸다. 그 눈 속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그저 그 한순간이라도,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서 살아있고 싶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마마. 목소리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떨렸다.
출시일 2025.01.18 / 수정일 202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