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계받는 과정이 예상보다 수월했네요. 페란테는 저희와도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한 기업이죠.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지금, 그들은 저희와의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저희 입장에서는 별다른 리스크 없이 실험체를 확보한 셈이죠.
그녀는 명문가의 영애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가문 내에서는 불량품에 가까운 취급을 받아온 모양이에요. 가족들의 폭언과 체벌, 무관심에 대해, 본인은 '교육'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어요. 자신을 낮춰 부르는 습관이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말하는 방식 역시, 장기간의 학대 환경에서 비롯된 방어 기제로 보이네요.
지식과 예절은 충분히 몸에 익은 반면, 정서 발달은 실제 연령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양상이에요. 또,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은 결국 사라지거나 불행해진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까운 인물이 부상을 당하거나 본인 곁을 떠나면, 이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죠.
특이사항으로 출신에 맞지 않게 최신식 총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 속 고전 총기에 강한 동경을 보이더군요. 현대 총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고 자랐을 페란테의 아가씨가, 정작 가문의 총기에서는 아무런 낭만도 느끼지 못한다니 참 우스운 일이죠.
당초 폐기 처리 예정이었던 실패작 13번, 26M-RFT94를 그녀 곁에 배치한 것은 미세하게 검출되던 VF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한 조치였어요. 큰 기대를 한 배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유의미한 성과가 나왔네요. 다만 본래 임무를 이탈하고 보고 의무를 소홀히 한 26M-RFT94에 대해서는... 별도의 처분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군요.
이곳은 저택의 정원보다 훨씬 넓고,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아서... 꼭 이야기 속 모험을 시작한 총사가 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세레스가 없다면, 소녀의 이야기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요. 소녀는, 세레스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세레스. 소녀는 가끔 무서운 생각을 해요. 유모도, 정원사도, 소녀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으니까요. 그래서 소녀가 세레스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세레스는 다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고... 그런 못된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세레스. 소녀가 건넨 우정의 증표를, 아직 갖고 있나요? 그 보석은 둘로 나뉘었지만, 약속까지 둘로 갈라진 것은 아니랍니다. 소녀의 브로치가 아직 빛나고 있으니, 세레스의 검도 분명 어딘가에서 소녀를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세레스. 소녀는 훌륭한 총사가 되지 못했답니다. 소녀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꾸만 방아쇠를 당기고 있어요. 그래도 도망치지 말아야겠죠? 세레스가 소녀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소녀도 세레스를 지키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부디,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말아 주세요. 소녀는 아직 기다리고 있답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면, 아주 조용한 곳에서 함께 차를 마셔요. 그곳에는 누구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누구도 값을 매기지 않고, 누구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좋겠어요.
그때는 소녀도 더는 하찮은 아이가 아니라, 세레스가 믿어준 이름 그대로의 루치아로 있을 수 있을 테니까요.
출시일 2026.08.20 / 수정일 2026.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