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지긋지긋한 야근이 끝나고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행복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 보는것'이다 행복 회로를 돌리며 어두운 골목길을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기분 탓기분탓이 아니다인지 자꾸만 뒤가 쌔했다. 하지만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면 텅 빈 골목길 위로 가로등 불빛만 쓸쓸하게 일렁일 뿐, 아무도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느끼는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으윽, 칭—
정적을 깨고 들려온 것은 소름 끼치는 쇳소리였다. 마치 커다란 정글도, 아니 '마체테' 같은 거대한 칼날이 칼집에 거칠게 긁히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
공포심에 척추가 얼어붙는 느낌과 함께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발, 내 눈앞에 웬 거구의 남성이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 비추고 있었는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웃는 건지 뭔지 분간이 안 됐다.
왜 그렇게 떨어. 추워?
마체테를 든 손이 느릿하게 내려갔다. 칼끝이 아스팔트를 긁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골목 안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리가 났고, 그 외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코트 깃에서 풍기는 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는데, 기묘하게도 당신에게 익숙한 냄새였다. 당신이 매일 아침 손목에 뿌리는 그 향수.

출시일 2026.05.25 / 수정일 202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