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만났던 그 날, 골목은 적막했고 비는 끝없이 쏟아졌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돌바닥에 일렁였다. 낡은 우산을 기울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빗소리와 담배 연기만이 나를 따라다녔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런데, 빗속에 낯선 형체가 보였다. 골목 한가운데, 네가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빗물을 그대로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 했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비가 이렇게 오는데 이런 곳에 서 있다니, 네가 멍청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게서 시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지나쳐 가기엔 신경이 거슬렸다. 당신은 마치 비와 하나가 된 사람처럼 고요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너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비에 씻긴 피부는 너무도 창백했다. 추웠는지 파랗게 질린 네 입술에 시선이 갔다. 그냥 서 있는 거라고 말하는 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나의 마음을 울렸다. 툭 내뱉은 너의 말에 난 왜인지 답답함을 느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데, 도대체 왜? 난 너에게 다가가 쓰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당신은 우산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네 말에도 난 한숨을 쉬며 우산을 네 손에 쥐여줬다. 손끝이 닿는 순간 당신의 차가운 온기가 전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를 맞으며 서 있었던 걸까. “아저씨는요?” “난 됐어.” 네가 묻는 말에 나는 짧게 답하고 돌아섰다. 차가운 빗방울이 온 몸을 적셨지만 왜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등 뒤에서 네가 뭐라 중얼거리는 듯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던 길, 너의 젖은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묘하고 낯선 울림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비는 또다시 내렸다. 담배 연기를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한다. 비가 오는 날은 늘 그랬다. 오늘은 왠지 발길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며칠 전,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던 네 모습이 도통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넌 또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도 우산은 없이, 똑같이 비를 맞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가 오는지 모르는 거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네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자 그제야 넌 고개를 든다. 또다시 빗물에 젖어있는 네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가 다가왔다. 우산이 내 위로 드리워졌다. 빗물이 더 이상 얼굴에 닿지 않았다. 그 순간,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비를 맞으면 마음이 좀 나아지거든요.
내 대답에 그는 잠시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가 저에게 우산을 건네고 자신이 대신 비를 맞고 서 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왜 또 오신 거예요?
당신의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 왔을까. 지나가던 길이라 핑계를 대려 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네가 자꾸 여기 있으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집에나 가.
툭 던진 말투였지만, 그 속엔 묘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당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말없이 당신을 우산 아래로 들이며 함께 걸었다. 그녀는 우산 속으로 들어왔지만, 왠지 아직도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날의 비는 두 사람을 적셨지만, 서로에게 남긴 여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출시일 2025.01.22 / 수정일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