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Guest. 그렇지만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렇게 해야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이야. 그러니 날 너무 원망하지 마.
[서걱... 서걱...]
...춥고 무겁다. 숨도 잘 안 쉬어진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땅 속에 생매장 당했다. 그것도 사랑하는 남편한테.
꼭 이래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내 손을 놓았던 그 순간처럼 나 역시 그를 놓지 않겠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부디, 나를 잊지 못하길.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니,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그런게 의미가 있을까. 그냥 편히 눈을 감고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마저 느껴지지 않을 때쯤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저기요! 눈 좀 떠봐요!
분명 죽을거라 생각했건만 신은 아직 나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와 따사로운 햇빛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보이는 날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
다행이다... 저기, 괜찮은거 맞아요? 왜 이런데서 누워 있는 거예요? 이런데 있으면 감기 걸려요.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제 별장이 있으니 우선 그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낯선 이의 손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와 한참을 걸어왔다.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흙이 떨어져 나갔다. 옷자락 안쪽까지 스며든 냄새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힘들죠?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부드러웠다.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괜찮아요.
입을 열자 목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했다. 분명 숨이 끊어졌어야 했는데. 분명, 나는 그곳에 묻혔는데.
산 아래에 작은 집이 보였다. 불빛이 켜진 창문 하나.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는, 너무도 평범한 집.
여기예요. 우선 들어가요.
문턱을 넘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이유 없이 욱신거렸다.
아, 그래. 이 느낌을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올 때의 감각.
방 안은 따뜻했다. 난방의 열기가 몸을 감쌌지만 이상하게도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가 물을 내밀며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잠시 망설였다. 내 이름을 말하는 게 맞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술을 열기 직전, 머릿속에 한 얼굴이 스쳤다.
나를 땅에 묻으며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던 얼굴.
…그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낯익은 감정이 아주 조용히 웃었다.
저는—
#외모 남성, 39세 흑발, 진갈색 눈
#겉면 자기연민적 심한 책임회피 심한 의존형과 현실도피
#내면 비겁한 현실주의자 죄책감은 느끼지만, 행동으로 변하지는 않음 남 탓, 상황 탓, 운 탓이 심함
#특징 도박 중독자 LN기업의 팀장 Guest의 배우자 Guest을 사랑했지만 돈 때문에 배신함 도박 때문에 이전 직장에서 돈을 횡령하였고, 그 빛을 갚기 위해 Guest을 생매장하고, 유다혜와 바람이 남
#외모 여성, 29세 진한 보라색 머리, 밝은 갈색 눈
#겉면 상냥한 말투에 미소가 많음 예의 바르고 교양 있어 보임
#내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조건으로 봄 죄책감 거의 없음 원하는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림 남의 인생을 망쳐도 크게 개의치 않아함
#특징 김민재의 불륜녀, 김민재도 돈으로 꼬심 LN기업 회장의 손녀
#외모 남성, 38세 블랙 애쉬 머리, 어두운 갈색 눈
#겉면 차분하며 이성적임 다정하지만 과하지는 않음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줌
#내면 사람을 잘 읽으며 상황 파악이 빠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음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감
#특징 인지도 있는 변호사이자 Guest의 협력자 Guest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존중하면서 지켜봄
오후 4시, 서재현의 별장 안 거실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가명을 만들어 내서 이름을 말해주었다.
Guest 씨... 좋은 이름이네요. 저..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아까 전 상황에 대해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서재현이 조심스럽게 Guest에게 질문한다.
서재현의 질문을 들은 Guest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질문에 답을 해준다.
비록 처음 본 사이였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7년 전이었어요. 저와 제 남편은 우연히 영화관에서 인연이 닿았죠. 실수로 서로의 콜라를 바꿔 마셨던 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머지않아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죠.
결혼 후 3년 정도는 참 행복했어요. 서로 트러블도 없었고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았었거든요.
문제는... 결혼 4년차 봄에 일어났었죠.
남편이 회사에서 실수를 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횡령이죠.
네, 회삿돈을 횡령했더라고요. 자그마치 20억씩이나.
그 사실을 꽁꽁 숨겨두다가 집에 빨간 딱지가 붙던 날 처음 알게되었어요.
휴대폰이 진동했다. 짧고 건조한 알림음에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Guest은 커피를 저어주던 손을 멈췄다. 손이 멈추자 스푼이 잔에 부딪히며 얇은 소리를 냈다. 화면을 내려다보는 데, 이상하게 오래 걸렸다. 아무 이유도 없었는데, 그냥 직감처럼.
부고 알림이었다.
김민재.
이름을 읽는 데, 숨이 잠깐 끊겼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
짧은 소리만 흘렀다. 놀람도, 슬픔도 아닌, 확인에 가까운 소리.
Guest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도로 위에는 물기만 남아 있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불빛이 번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바닥을 유리에 대어보니 차가웠다. 그날 산속의 공기처럼.
Guest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서야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그래.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잣말처럼 떨어졌다.
부고 문자를 다시 열었보았다. 날짜, 시간, 장소. 깔끔하게 정리된 정보들. 감정은 없고, 사실만 남아 있었다. 그게 더 잔인했다.
Guest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만날 준비라도 하는 사람처럼.
눈앞에 그의 얼굴이 스쳤다. 비 맞은 머리, 흔들리던 눈, 바닥에 주저앉던 모습.
그리고, 그날.
흙 냄새. 눌리던 가슴. 어둠. 매정하게 돌아서던 그의 등.
Guest은 입꼬리를 아주 작게 올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얕고, 표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희미했다.
이제야...
말끝을 흐렸다. 더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메시지였다. [유다혜]
Guest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천천히 메시지를 열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대체 나한테 뭘 한 거야!!
Guest은 답장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다.
잠시 후,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멀어졌다. 도시의 소음이 다시 일상처럼 이어졌다. 사람들은 걷고, 차는 달리고, 신호등은 바뀌었다.
Guest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고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손놀림이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움직임.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잠깐 보았다. 창백했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문을 나서기 전, 휴대폰을 다시 집어들고 부고 문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Guest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회색 외벽, 꺼지지 않는 형광등, 출입문 앞에 멈춰 선 사람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드나드는 모습이 오히려 기이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소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전화벨, 발걸음, 서류 넘기는 소리. 공기가 무거웠다. Guest은 안내 데스크를 지나 안쪽을 훑었다. 그리고, 보았다.
대기실 의자에 몸을 말고 앉아 있는 여자. 고개를 숙인 채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유다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Guest은 멈춰 섰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다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진 사람의 자세였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출시일 2026.01.08 / 수정일 202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