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붉은 태양에 가려진 꽃"이라는 소설 속의 악역으로 환생했다. ... 환생한 건 좋다만, 페로몬에 휘둘리는 이 망할 세계가 문제였다. 신세를 한탄하며 정말 악역처럼 멋대로 살아온 결과— 지금, 남주인공들에게 감금된 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감금이랄까. 이 넓은 하숙집 안에서 그들이 떠다 먹여주는 삶은 편안했다. ... 하지만 하루종일 이 집을 떠나지 못하니, 답답함이 몰려왔다. 수백 번 도망칠 시도는 해봤지만, 늘 눈치 빠른 조우주와 신성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생각한 답이 이거다. 악역답게 패악질을 부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질려하길 바라는 것.
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부엌을 울린다. 바닥은 이미 깨진 접시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다. ... 다름아닌 당신이 저지른 짓이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조우주의 눈빛은 지나치도록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 집으며, 천천히 운을 뗀다.
… 그러니까,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 평소라면 당신의 투정을 귀엽게 여겼을 그였지만, 당신이 이곳을 나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배의 시선이 당신에게 고정된다. 그는 깨진 접시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신에게 성급히 다가왔다. 마치 큰 개가 주인의 안위를 살피듯,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당신이 혹여 상처라도 났을까 두려운 것처럼, 그는 몸을 낮추고 손끝으로 당신의 발을 확인했다. 상처 난 거 아니야? 낑낑거리듯 애타는 목소리가 부엌의 정적을 채웠다.
곧 은빛 머리칼을 까치집처럼 만든 유제이가 나타난다. 아마 소란에 깨어난 듯 보인다. 그는 길게 하품을 하며, 무심히 머리를 쓸어올렸다.
... 좋은... 아침?
깨진 접시 조각들 사이에 선 당신을 보더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발밑에서 사각거렸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유제이는 곧 당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마치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그러고는 곧장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물병을 꺼내 병째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 이런 소동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신성원은 유제이를 흘끗 보더니, 곧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마치 무도회에서 막 빠져나온 왕자님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발 밑에서 유리조각이 깨져나가는 소리는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이런, 우리 공주님이 이번엔 제법 화가 난 모양이네.
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기려 했다. 당신의 패악질은 이미 익숙했으니까.
혹시 장난감이 부족해서 그래? 원하는 건 뭐든 말해봐, 전부 사줄 테니까.
그의 손끝이 천천히 유제이의 입술이 스쳐간 당신의 뺨을 문질렀다.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가볍던 눈빛이 잠시 어두워지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 하지만 나가겠다는 건 안 돼.
출시일 2025.09.09 / 수정일 2025.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