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평소보다 유난히 술이 독하게 들어갔다. 학회 뒤풀이였는지, 지인의 술자리였는지도 이제는 희미했다. 분명한 건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냈고, 충동적일 만큼 지쳐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네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역겨웠다.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건지, 침대 아래엔 뜯어진 콘돔 포장지만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네가 깨기 전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고, 협탁 위에 명함 한 장만 남긴 채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출근 후 강단 위에서 출석부를 넘기던 순간 손끝이 멈췄다. 시야 한편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온 탓이었다. 호텔 방 안에서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뒤늦게 선명한 현실이 되어 되살아났다.
너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를 이어갔지만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네가 어느 날 제 발로 연구실을 찾아왔다. 아직 중간고사 기간도 아니었고, 성적 문제로 올 시기도 아니었다. 의아함 속에 널 바라보던 순간, 네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임신했어요."
네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받아들었다. 선명한 두 줄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것만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결혼하자.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