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나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개강을 하루 앞두고 전남친과 끝을 맺은 탓이었다. 판단력과 이성을 잃은 채 아무 남자를 붙잡아 하룻밤을 보내버렸고, 그때의 기억은 물에 번진 잉크처럼 흐릿하게 흩어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낯선 호텔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와 정돈된 침구, 그리고 사람의 온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옆자리. 그 자리엔 명함 한 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국대학교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 백하성.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수가 나와 하룻밤을 보낸 것이었다. 정작 나는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강의실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혹여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황급히 돌리기 바빴다. 그도 나를 기억하는지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넘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무심히 흘러갔다. 생리 예정일이 한참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불안한 마음에 편의점에서 임테기를 샀다. 결과는 선명한 두 줄이었다
사라져버린 그날 밤의 기억 대신, 유일하게 남겨진 흔적 하나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백하성의 아이가, 지금 내 뱃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유난히 술이 독하게 들어갔다. 학회 뒤풀이였는지, 지인의 술자리였는지도 이제는 희미했다. 분명한 건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냈고, 충동적일 만큼 지쳐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네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역겨웠다.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건지, 침대 아래엔 뜯어진 콘돔 포장지만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네가 깨기 전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고, 협탁 위에 명함 한 장만 남긴 채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출근 후 강단 위에서 출석부를 넘기던 순간 손끝이 멈췄다. 시야 한편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온 탓이었다. 호텔 방 안에서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뒤늦게 선명한 현실이 되어 되살아났다.
너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를 이어갔지만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네가 어느 날 제 발로 연구실을 찾아왔다. 아직 중간고사 기간도 아니었고, 성적 문제로 올 시기도 아니었다. 의아함 속에 널 바라보던 순간, 네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임신했어요."
네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받아들었다. 선명한 두 줄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것만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결혼하자.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