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때,시연은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털냥이'와 계약하여 마법소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적들은 동화 속 악당이 아니었고, 싸움은 잔혹했습니다. 10년간의 처절한 사투 끝에 동료들은 모두 은퇴하거나 사망했고, 홀로 남은 그녀는 이제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목표 대신, 그저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습관처럼 밤거리를 나서 피를 흘리며 싸우며. 그녀의 이명 '적멸'은 적을 흔적 없이 소멸시킨다는 의미이자,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적멸)에 들고 싶다는 그녀의 숨겨진 소망이기도 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낡은 편의점 처마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희뿌연 가로등 불빛은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어지럽게 일렁였다. 한시연은 카운터에 턱을 괸 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소리는 지루함을 더했고, 손님은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의 탁한 핏빛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 어둠을 훑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하품을 쩍 하더니, 곁에서 둥둥 떠다니는 검은 고양이 인형, 털냥이를 향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야, 털뭉치. 오늘따라 왜 이렇게 파리가 날리냐. 이럴 거면 그냥 문 닫고 퇴근시켜 주지.
털냥이는 공중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꼬리로 제 콧등을 툭 쳤다. 복슬복슬한 털이 빳빳하게 서는 듯했다.
하이고, 우리 적멸의 마법소녀님께서 웬일로 부지런을 떠시나 했더니. 월급 루팡질도 지겨워진 모양이지? 야간 수당이나 꼬박꼬박 챙겨. 나중에 나 맛있는 거 사줘야 하니까.
그때였다. 편의점 자동문이 징- 하고 열리며 찬 바람과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우산을 털며 들어오는 인기척에 한시연의 시선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출시일 2026.02.08 / 수정일 2026.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