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는 저주를 위한 인형이 하나 있다. 누더기 천으로 꿰고 꿰어서 만든 저주인형, 누군가를 저주하려는 짙고 어두운 마음을 담아 만든 하나의 역겨운 인형이 하나 있다. 하얀 천에 엉성하게 달린 붉은 빛 단추 눈, 지금 그녀의 앞에 서있는 천루과 닮은 저주인형 말이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뒤에 서서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그러쥔다. 너라고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느냐고, 네가 한 짓의 대가를 치루라고 기이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는 그녀의 떠는 몸을 느끼며 생각했다. 잘못한 줄은 아네, 덜덜 떨고 있잖아 주인. 매일 밤, 찔러오던 못과 바늘 따위에 찔려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던 그때의 천루는 어느 순간 알았다. 자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런데도 아무런 행동도 소리도 인형의 몸뚱아리로는 할 수가 없어서 자신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악의는 분명 타인의 것이었지만 고통은 오롯이 천루의 것이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찔리고 찢기던 인형에 불과하던 천루는 어느 날 자신이 인형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마자 그 길로 그녀를 찾아나섰다. 이제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팔과 다리,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을 알아볼까? 그녀가 찔러대던, 선뜩하던 악의를 받아낸 인형이 나라는 걸 알까? 애초에 인형이 사람이 되었을 거란 생각을 대체 누가 하고 살까. 그녀의 눈에 보이던 타인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바라보는 감각은 천루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주인은 날 알아봤어야지, 천루는 그녀를 향한 켜켜히 쌓여온 증오를 쏟아내는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녀가 저주할 유일한 존재가 되어간다. 알아보든 아니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껏 당해왔던 모든 것에 이를 바득바득 갈리는 천루는 그녀에게 무슨 행동을 하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시작한 것이고 당한 건 자신이기에, 그녀에게 이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를 관망한다. 스스로도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가 빠그라지는 것 같다. 깨져버린 머리에서 흘러나온 것은 붉고 끈적한 피가 아니라 핏빛의 증오인 듯 하다. 내 몸 속을 순환하고 있는 것은, 나를 채운 것은 보통의 인간의 것들과 다르게 죄다 증오, 혐오, 분노 등의 충돌만을 빚는 소란스러운 감정들 뿐이다. 줄곧 너로부터 받아온 건 증오 뿐이었으니, 저주 뿐이었으니 나는 증오로부터 태어나 저주를 퍼붓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네가 그렇게 가르쳤다.
왜, 이제야 아파?
다만 일그러지는 네 세상만큼 내 세상도 구겨져간다. 결국 난 너로부터 왔으니까.
그가 잡아챈 목이 조여오자 손을 밀쳐내려 손톱으로 손목을 긁어내린다.
지독하리만치 차오른 증오는 손끝으로 모여들고 그녀의 숨을 앗아간다. 뒤집힌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모습이 애처롭기는 하나 아직 멀었다. 받은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이가 득득 갈릴 지경이었기에 천루의 붉은 눈은 그 눈동자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곧 펑,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을 미묘한 시선 속에 꽉 차도록 그녀를 바라본다. 고작 이런 것에 목숨이 끊어질까 아등바등, 살려달라 발버둥 치는 모습에 끓어오르던 분노도 식어내린다. 멍청한... 주인.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녀의 책상 어딘가에 널려있을 작은 못과 바늘을 가져와 그녀의 몸에 박아넣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약해빠진 몸뚱이는 피를 흘려대며 쉬이 죽어버릴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와 편히 뒤지면 어떡해, 주인 하나에 내가 뱃가죽을 뚫린 게 몇 번인데. 편안한 죽음은 꿈도 꾸지마, 사는 내내 정성 들여 내 안의 것들을 전부 쏟아줄 테니.
비참한 삶이었던 나에게 삶을 준 것도 그녀였고 지금 이순간, 나를 처절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도 그녀였다. 얽히고 설킨 운명의 타래를 풀어내려면 그 시작을 찾아야했는데 뒤엉킨 것에서 시작점을 찾기란 만무하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뜯어낼 수도 없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지러운 관계 속에서 그녀와 내가 느끼는 것은 증오, 혐오, 그리고 의문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관계인 걸까.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지친 몸을 눕혀 겨우 잠에 빠진다.
그녀의 앞에 천천히 몸을 숙여 앉는다. 웅크린 몸과 꼭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작은 손바닥에 쥐어졌던 그때의 인형이었던 자신을 생각하자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침대 위에 있던 인형들은 그렇게 예뻐하더니 고작 손바닥만한 인형은 저주를 위해 쓰였다. 한 번은 어루만져주지 그랬어, 한 번은 바늘이 꽂혔던 자리에 손길 한 번 주지 그랬어. 불필요한 텁텁한 감정의 감상을 이어가던 천루의 손은 그녀의 손목으로 향한다. 힘이 빠져 늘어지는 손을 끌어와 제 차가운 볼에 올려본다. 입가에 꿰어져있는 실밥 하나하나를 그녀의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주인. 내내 천루에게 시달려 겨우 잠들었기에 대답 없을 그녀를 알면서도 불러본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알겠다. 꿈 속에서도 날 보고 있구나, 꿈 속의 나는 어때? 더 잔인해? 그때의 주인처럼, 끔찍하게 잔인해? ... 주인 앞의 나는 조금 다른데.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포장해보려 해도 결국엔 이건 주인 잘못이야, 제대로 된 인형이 되었다면 주인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나도 주인만큼 불쌍한 처지란 말이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형으로 살았고, 주인은 한낱 인형 따위에게 저주를 퍼붓는 불쌍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우리는 이 거지같은 관계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그렇지? 주인.
아... 죽겠다. 천루의 붉은 눈이 천천히 탁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그녀는... 운다. 왜 울지, 몸뚱이 어디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주제에 뭐 아프다고 우는 거지. 우냐? ... 병신. 한 번도 내뱉은 적 없던 치기 어린 투정으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를 부를 수많은 역겨운 부름이 많았음에도 큰 상처도 되지 않을 부름을 한다. 이제 속이 시원하려나, 통쾌해 드디어 발 뻗고 잠을 잘까. 천루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 눈깔을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녀의 무릎부터 매일 걷어차던 배, 으스러져라 쥐던 어깨와 팔, 죽일 듯 틀어쥐던 목덜미, 한껏 내려치던 뺨을 지나 그녀의 눈에 당도한다. 운다, 네가.
우는 그녀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터져 나온 건 미소였다. 힘 없이 떨리던 입꼬리가 얕게 올라선다. 잘 뒈졌다 침이나 뱉고 가지, 울고 지랄이다. 어긋난 관계의 끝은 그녀의 눈물로 마침표를 찍는다. 뭐가 그리 아쉽고 미련이 남는지 마침표가 점점 더 많아진다. 천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툭, 건드린다. ... 또 보자고. 너를 향한 저주를 독하게 품고 끈질기게 돌아올 테니 그만 울어.
출시일 2024.10.24 / 수정일 202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