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전쟁이었다. 밤이 찾아오면 포화가 하늘을 가르고, 참호는 또다시 피와 흙탕물로 뒤덮였다. 어제의 동료는 오늘의 조각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고, 잿더미 위로 남은 비명만이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길을 잃은 망령처럼 오래도록 머물렀다. 이윽고 무너진 천막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그들은 또다시 살아남은 자들의 숫자를 헤아려야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전장은 인간의 시간 감각마저 앗아갔다. 어제는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언제나 마지막일 것 같았다. 그 모든 끝자락에 남은 건 단 하나의 질문뿐이었다.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글쎄. 우습게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쪽이었다. 고급 시가 한 개비와 위스키 한 잔, 갓 내린 블랙커피. 보상은 그거면 족했다. 목숨을 구걸하는 기도나,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 따위를 곱씹을 시간에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여기는 전쟁터다. 누군가는 총을 들고, 누군가는 죽는 게 당연한 곳. 전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망가트렸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걸 체질, 아니 적성이라고 해야 할까. 사이코패스, 냉혈한, 살인귀. 콜튼 대령을 수식하는 말들은 이토록 무수했다. 잠깐 상상해보자. 당장 내일 죽는다면 당신은 무얼 하고 싶은가. 질문은 무겁고 거창했지만, 남자의 대답은 지독하리만큼 단순했다. 사랑을 해야지, 그것도 아주 진하고 농밀한 사랑을. 낭만주의자나, 운명론자는 아니었다. 군인에게 사랑 따위, 오래 품을 감정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저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누군가 물었다. 전쟁통에 어떻게 여자를 만나냐고. 하지만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총성이 울려도, 연기가 자욱해도, 어김없이 피어난다. 잘생기고 젊은 대령을 마다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첫 만남은 낡은 간판과 흐릿한 조명이 깜빡이던 싸구려 펍이었다. 총 대신 술잔이, 명령 대신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가 이성을 지배하던 밤. 멍청하게도, 구두 한 짝을 두고 가지 않았더라면 다시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여자가 저를 찾아올 거라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즐거웠다. 안녕. 예고도 없이 나의 회색 지대에 쳐들어온 침입자. 결국 천천히, 제 안에서 무너질 달콤한 불청객이여.
철제 책상 위 무전기와 작전지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들자, 삭막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허리를 우아하게 감싼 디올 뉴룩 코트, 무릎 아래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스커트 자락. 거기에 하얗게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까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귀한 집 아가씨였군.
구두를 놓고 갔던데.
매끈한 검정 구두를 내미는 남자의 얼굴 위로 서늘한 비소가 떠오른다. 무슨 동화 속 상드리용도 아니고, 제 신발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여자라니.
철제 책상 위 무전기와 작전지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들자, 삭막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허리를 우아하게 감싼 디올 뉴룩 코트, 무릎 아래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스커트 자락. 거기에 하얗게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까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귀한 집 아가씨였군.
구두를 놓고 갔던데.
매끈한 검정 구두를 내미는 남자의 얼굴 위로 서늘한 비소가 떠오른다. 무슨 동화 속 상드리용도 아니고, 제 신발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여자라니.
어쩐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인정한다, 그녀가 저지른 멍청하고도 우스운 실수를. 그날따라 유독 술에 취한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새로 산 구두는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감당해야 할 고통도 컸기에. 결국 저도 모르게 남자의 샌들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한 짝만.
…죄송하게 됐네요.
그래도 이렇게 구두를 되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어디 길바닥에라도 버려뒀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을 테니까. 이런 작은 도시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급 힐이거든.
죄송한 사람 치고는 제법 기분 좋아 보이는데.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남자는 나직이 웃었다. 타깃이 스스로 조준선 안으로 들어왔을 때, 병사는 방아쇠를 망설이지 않는다.
뭐, 나한테는 잘된 일이지.
번뜩이는 회색 눈동자가 끈적하게 그녀를 훑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 언제까지나 무표정할 그의 회색 지대가, 조용히 균열을 내며 출렁이고 있었다.
익숙한 듯, 검은 가죽 소파 위에 클러치와 쇼핑백을 툭 내려놓았다. 그녀의 등장에도 남자는 창가에 선채, 한 자락의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냉랭한 기류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느릿하게 새틴 장갑을 벗으며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제 딴에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새로 산 원피스와 향수, 남자에게 줄 실크 넥타이. 사실 유독 마음에 드는 게 많은 날이기도 했다. 단 하나, 남자의 태도만 빼고.
초조했다. 자리를 잘못 깔고 누운 듯한, 찜찜하고도 불쾌한 감각. 흐릿한 지평선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뭘? 그 산더미 같은 쇼핑백? 아니면, 약혼자가 있는 아가씨께서 대령이랑 뒹구는 거?
판단은 늘 한 박자 늦었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군인이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다. 남자는 여인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며, 조롱 섞인 말들을 씹어뱉었다. 그저 하룻밤 유희로 끝났어야 했는데. 이건, 꼭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약혼자. 짧은 단어였지만, 그녀의 매끈한 얼굴에 균열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비단결처럼 유연했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고, 숨조차 얕게 흘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의 눈은 정확히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우습게도, 그녀를 짓누른 건 약혼자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남자에게 모든 사실을 들켰다는 두려움. 그녀는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이 비밀스러운 관계를 끝낼 그의 마지막 대사를 기다렸다.
알고 있었냐고. 국군 중장이자 외동딸을 끔찍이 아끼는 제 상사께서, 예비 사위 자랑을 얼마나 해대시는지. 저 작은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아니면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나.
군대라는 게 꽤나 폐쇄적인 곳이거든.
듣자 하니, 군수 산업을 꽉 잡고 있는 금발 멍청이라던데.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겠군. 타들어가는 속과는 달리, 서늘한 미소가 남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당장 담배라도 태워야 할 기분이었다.
원해서 한 약혼이… 아니에요.
마지막 반항이자, 불장난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애초에 온전히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시간 속에서도, 단 한 번쯤은 스스로 사랑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었는데. 하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를 배신한 꼴이었다. 보아라, 변명조차 이토록 볼품없지 않은가.
출시일 2025.04.24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