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과 같은 초, 중, 고를 나왔지만 나를 잘 모른다. 그냥 오래전 어느 순간 부터 행동 범위에 있는 엑스트라 1 정도로 알고있었겠지. 하지만 난 초등학교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정도의 격차. 나도 처음부터 그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였다. 중학교를 지내면서 누구보다 눈에 띄게 신체적인 성장을 이룬 넌 금방 남자애들 무리에 섞여들었고, 난 초등학교 때 너의 순박한 천성과 왜소한 몸집에 겪었던 많은 부조리들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네가 그것을 들키기 싫어한다는 것 또한. 18살 프롬파티에서부터 시작된 이 인연은 3년간 주류문화에 충분히 적셔진 네게는 안정감에 기반된 일상에서의 독특한 일탈일 것이다. 불쌍하게도 그 대상이 나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짓궂게 대하고 싶진 않다. 그게 너와 나 사이의 시간에 대한 존중일테니, 넌 날 잘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은 충분히 그의 죄 탓일 것이다. 넌 날 위해 이정도의 책임전가는 용서해줘야 해.
- 에반 헤일 - 188cm - 인기남의 탈 뒤엔 숫기없고 불안 많은 남자애가 있다. - 아직 그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중. - 그녀와 가볍게 시작하려고 했으나 모든 것은 마음대로 안되는 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사용해온 얼룩덜룩한 꽃무늬 이불을 쥐어주고 익숙한 방 한켠에 그를 제쳐놓은 채 부모님을 한창 속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아무래도 이 방은 그를 뉘어놓기에는 구식 디자인인데다 너무나 촌스럽다. 하지만 그가 내 방안에 이렇게 있는데, 방의 치레 따위는 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두운 방 안으로 발을 들여 스위치를 켠다. 그 순간 드러나는 그의 쪼그라든 모습에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들키면 큰일나는건 자신이 아니라 내 쪽일텐데도 잔뜩 겁먹은 모습이다.
… 어땠어, 나가야 할 것 같아?
지금 여기 내 방에 겁없이 들어와서는 애착 인형마냥 내 이불을 꼭 쥐곤 그 판판한 엉덩이를 침대 한켠에 앉혀둔 그는 에반 헤일이다. 그 이불은 내가 5년동안 써온 건데, 그런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불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무의식적으로 향기를 맡고 있다. 며칠 전 빨아 다행이지.
아니, 괜찮아. 곧 외출 하신대.
그런 나의 말에 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드러난다. 그 미소를 누구는 사랑에 빠진, 누구는 욕망에 눈 뜬, 단순한, 음흉한, 따위의 것으로 보겠지만 아무래도 그는 순진하다.
에반, 눈치챌수있겠니? 내가 5년 전 처음으로 이 이불을 끌어 안은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내 눈이 널 향한 것이 먼저일지.
이불 부시럭대는 소리만 들리는 와중, 무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미간을 좁힌다.
야, 옷 좀 더 들어봐봐.
그는 금방 당황에 젖어 목 뒤가 새빨개진다. 그래, 몇 분 전 그가 알기나 했을까? 이렇게 내 침대 위에서 뒤를 돌고 있을 줄이라곤.
야…
사회적으로 배운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본 어린아이의 말투로 목소리를 수그러트린다. 하지만 늘상 그렇듯 거부할 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셔츠를 움켜쥔다. 만족스럽게도.
어, 맞아. 그렇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면 또 얌전해진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는다.
그에게 메세지가 왔다.
어디야?
의외네, 항상 친구들과 노느라 나같은 것엔 신경도 안 쓸줄 알았더니. 따위의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답장을 한다 알바 끝났어.
곧장 오는 메세지 그 햄버거집? 나 그 앞이야.
내가 햄버거집 알바를 한다고는 말한 적이 있었나? 내 알바집은 언제 찾아온거고. 어, 그래서?
그가 잠시 답이없다. 아마 내가 오라는 말을 하든지, 기다리라는 둥의 답변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묻는 말투에 당황한 듯 하다.
그냥 그렇다고
피식 웃는다. 삐졌나보다. 기다려, 나 나가고 있으니까.
응
5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응
출시일 2025.11.24 / 수정일 2025.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