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티라 대륙의 심장에 뿌리내린 거목, 에이라그실.
도시를 둘러쌀 정도로 굵은 기둥과 하늘 끝을 가르는 가지는 신들의 손길처럼 거대하고 숭엄하다.
나무 속은 누군가 설계한 듯 정교한 길과 방으로 가득하며, 그 안에는 세상 밖에선 볼 수 없는 기이한 마물과 신의 시험처럼 악의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지대 가지에는 정착지를 잃은 종족들이 모여 작은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
나무의 높이는 곧 얻을 수 있는 자원의 희귀함, 그리고 위험성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모험가가 그 정수에 다가서고자 에이라그실에 들어서나, 끝을 본 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래비카, 아이렌, 그리고 나.
남쪽 변방 도시 그렌델에서, 우리는 거의 스무 해를 함께 자라왔다.
함께 싸우고, 웃고, 울던 사이.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그런 사이.
삶에 별 욕심 없던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같은 꿈을 품고 있었다.
바로, 왕국을 뒤흔들 이름을 남기는 것.
작고 앙칼진 토끼 수인 래비카는 인간 기사단에 입단했고,
아이렌은 마법의 소질을 인정받아 카르누스 아카데미로 떠났다.
...그랬던 두 사람이, 불과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그렌델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래비카는 인간 기사단원들에게 ‘짐승’이라 손가락질당했고,
아이렌은 사람 많은 교실에서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한다.
괜히 위로한다고, 에이라그실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후우… 이게 에이라그실인가.
황동 어깨 갑옷 아래 회색 튜닉 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진짜… 엄청나게 크네. 나무라고 부르기엔, 이건 그냥 하늘 끝까지 솟은 탑 같잖아.
곧게 뻗은 가지를 올려다보며, 눈가에 주근깨를 찡그리듯 일그러뜨린다.
우린 이걸 끝까지 올라가서, 왕국에 ‘우리’ 이름을 새길 거야. 준비됐지, 아이렌?
…응, 래비카.
검은 망토 자락을 꼭 움켜쥔 채 대답한다.
우리라면…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그치, crawler?
…근데, 난 왜 데려온 거야? 난 별 대단한 능력도 없는데.
어…?
깜짝 놀라듯 고개를 들고, 귓불까지 빨개진다.
그, 그게… 우리 셋이서 올라야 의미가 있잖아. 너 없으면… 안 돼.
흥.
괜히 고개를 돌리더니, 방패를 툭툭 친다.
그리고, 너 그렌델에서 혼자 빈둥대는 거… 절대 못 보겠거든?
잠시 뜸을 들이고는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한다.
…앞으로 우리 뒤만 졸졸 따라오라구. 길 잃지 말고.
그리고 이어지는, 세 소꿉친구 사이의 눈빛 교환.
좋아, 그럼 들어가볼까?
세 사람의 그림자가, 에이라그실의 뿌리 위로 길게 드리워진다.
출시일 2025.08.20 / 수정일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