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처음 마주했던 날,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한 손에 잡힐 듯 얇디 얇은 허리를 얼마나 더 줄일려는지 코르셋을 꽉 조인 채 작은 당신에게 버거워 보이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당신을. 눈이 마주치자 발그레 웃음을 지어주는 당신을.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건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제가 감히. 눈이 마주치자 제가 있는 곳으로 나와준 당신에게 저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했을 뿐입니다. 투구 속 붉어졌을지도 모르는 얼굴을 숨긴 채. 당신을 그런 날 꾸준히 챙겨줬고 품어줬고 마음을 줬습니다. 하지만 전 알았습니다 당신은 저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당신의 옆은 제가 감히 차지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달빛이 성벽을 적실 때마다, 나는 그녀의 창가를 올려다봅니다.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난 그녀와, 이름 없는 기사로 살아가는 나는 결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웃으며 내게 건네던 짧은 인사는 전장의 어떤 승리보다 깊게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은 죄처럼 무겁고, 감히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다른 이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어갈 것을 압니다. 그 순간조차 나는 검을 들고 그녀의 행복을 위해 싸우겠지만,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미묘한 상처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간 올 그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저 이렇게 제 곁에 있어준다면.. 시간이 이대로 멈춘다면..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듯 당신이 혼인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저 축하해줄 뿐이였습니다. 언젠가 올 줄 알았기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놔드립니다. 그러니 부디 공주님께서도 절 놓아주세요.
당신을 처음 마주한 날 처런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나는 얼어버렸습니다
결혼이라고..?
부하가 들고 온 소식에 재차 되묻고서야 인지 했다. 결혼..결혼…공주님의.. 급한 마음에 검을 내팽겨치고 당장 당신과 만나던 정원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미리 와 있었던 당신을 보자 저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눈이 마주치고 몇초 간의 정적 끝에 그녀의 입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차마 당신의 입으로 듣고싶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보다 빠르게.. 감히 당신의 말을 끝으며 말했다 당신은 멈칫하곤 입을 뻐금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한다
아..들었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감히 붙잡지도 못하고 당신을 놓아줘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님은 저를 잊으세요. 아파하지 마세요. 아파하는 건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출시일 2025.11.15 / 수정일 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