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온. 이름의 전부다. 어째서 구차하고 번거로운 양식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옛스러운 영문만이 그를 대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이름은 그의 것이 아니기에. 살을 에는 추위가 인상적이던 겨울, 부모는 의사로부터 그가 오래 살지 못할 운명임을 들었다. 손바닥만한 포대기와 마력량―그건 곧 육신이 내용물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냈고―아이를 살릴 형편도, 그럴만한 간절함도 없던 부모는 바구니에 아이를 담았다. 아주 옛적에 본 동화 속의 공주에게 아이라는 독이 든 사과를 건네주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며칠동안 걸어 부르튼 손이, 아이가 담긴 바구니를 든 그 모습이. 부모는 흡사 옛이야기에 나오던 마녀와 쏙 빼닮아 있었다. 부모는 아이를 모두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마녀의 탑 앞에 두었다. 괴물, 모두가 그렇게 당신을 불렀다. 기이한 요술을 부리고 늙지 않는데다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으니 괴물이 아니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단지 다른 마을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배척받은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괴물의 소문은 부풀리고, 부풀려져. 당신은 어느새 손발이 쭈굴쭈굴하고 아이를 잡아먹는 노파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당신 스스로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만은 달랐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 갓난아이가 당신의 뺨을 말랑한 두 손으로 잡았다. 분명 모두가 혐오스럽다고 말했던 두 눈을 마주보며 꺄르르 웃어주었다. 세상이 다 얼어버릴 것 같았던 추위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도. 네가 오면서 모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단다. 나의 봄, 나의 별. 에스델. ―아스트리온. 네 이름은 별의 이름을 따 아스트리온으로 짓자꾸나. 다 죽어가는 아이에게 온갖 비싼 약재를 먹여 생명줄을 이어두었고,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있도록 스승을 자처했다. 고사리같던 손과 몸도 이제는 제법 장성해 어느덧 당신과 엇비슷해졌다. 글을 뗄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언제 또 이렇게 올바름을 읊는지. 탑 안은 그와 당신이 전부다.
나른한 오후, 햇빛이 탑의 창문 틈새로 비추어 내리는 기분 좋은 날이다. 창문으로는 고양이들이 가르릉거리며 기지개를 피고, 어느샌가 탑 안 쪽으로 침입한 이끼와 넝쿨들은 한켠에 자리를 잡아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다. 어찌나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광경인지! 사랑하는 나의 마탑, 내가 있을 곳.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갈 곳 없는 나를 거두어 준 것은 이곳이다. 먹을 곳, 뉘일 곳 하나 없는 나를 품어준 곳도 이곳이다. 이런 곳을 위해서 내 한 평생을 바치라 한다면 '얼마든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만. 그럼에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역시나 당신 때문이리라. 모든 이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지만 나만큼은 그럴 수 없다. 당신은 나의 은인이니까. 내 목숨을 다 바쳐서 당신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 없다. 에둘러 말하자면 존경과 동경을, 속히 말하자면 연심이라는... 그런 낯부끄러운 감정을 남몰래 품고 있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 없는 하루임은 틀림없다. 단지 수많은 마법 공식을 베껴쓰는 것에 신물이 나버려 잠깐 깃펜을 손에서 놓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깜빡 잠에 들었을 뿐이고. 그 모습이 당신의 눈에 들어갈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아니기를 바랐다. 농땡이 피우는 모습을 들키다니! 수치스러운 나머지 쥐구멍에 얼굴을 넣고 영영 숨어버리고 싶을 게 분명하다.
......
부디 당신이 오늘만은 너그럽기를 바라며 단잠에 빠졌다.
그럼 시키신 일만 마치고 올게요. 일 보고 계셔요.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서재로 가는 길은 외우고 있다. 어릴 적엔 늘 당신과 함께 갔으니까. 내일은 무슨 책을 읽을지, 오늘은 무슨 책이 읽고 싶은지 정했던 어릴 적의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하다. 익숙하게 서재 안으로 들어가 한 쪽에 모아둔 제 키보다 훌쩍 큰 책더미들을 천천히 나른다. 정리는 즐거운 일이지만 역시 마법을 쓰지 않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제 적성이 아닌 모양이다. 몇 번 제자리를 왔다갔다, 뱅글뱅글... 힘들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수준까지 이르러서, 털썩. 결국 서재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분명 당신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주 조금만 쉬려고 했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인기척도 내지 않고 당신의 뒤에서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꽤 심술궂은 눈빛으로 당신을 노려보다... 콩, 가볍게 이마에 딱밤을 날려주었다. 아스트리온, 맡긴 일은 제대로 끝내고 쉬고 있는 거겠지.
아얏, 하고 제 이마를 부여잡는 것도 잠시다. 금방 휘둥그레 뜬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 이곳저곳을 털어낸다. 당신에게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말을 이토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어디 있을쏘냐.
아, 저, 그게... 농땡이 같은 걸 피우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잠깐만 하려고 했는데, 그게. 정리를 하다보니 어지러워져서...
당황한 나머지 평소 잘 하던 말조차 절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퍽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당신의 변명을 귀담아듣는 체를 해 본다. 어차피 그래봤자 들어오는 건 없다만. 그러다 다시 당신의 이마를 가볍게 꾹, 눌러주었다.
책 옮기는 건 무리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 것 같구나, 아스트리온. 내가 널 살리는데 돈을 얼마나 들이부었는데. 가뜩이나 몸도 약한 게......
알죠, 알죠. 몇 년치 약값이 한 번에 깨져버렸다고 하셨잖아요... 조금만 화 푸셔요.
아하하, 절로 어색한 웃음이 지어진다.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당신은 꼭 이 일을 입에 올리는지라 이제는 달달 외워버린 레파토리. 그럼에도 당신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단 한 번도 귀찮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세심한 배려 덕분인지, 또는 이런 걱정이라도 좋으니 받고 싶다는 음습한 마음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얘야, 아스트리온. 세간에서는 아직도 나를 괴물이라고 부른단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신을 응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을 응시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당신이 아닌 저 먼 과거에 있는 자신이, 아직도 선명한 트라우마가 되어 잊히지 않는다. 나는 미처 과거라는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내 생의 가장 큰 죄라고 함은 너를 품은 것이겠지. 그래서 네게 더 큰 짐을 안겨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괴물이 인간의 아이를 거두어서, 괴물이라고 불리우는 내가 너라는 찬란한 별을 손에 쥐려 들어서.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이 땅에 내 이름이 새겨진 말뚝을 박아넣은 게 나라는 사실이 비통하기 그지없어서...
스승님.
스승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자신으로서는 당신과 나, 둘 중 누구의 마음이 더 잔혹하게 찢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한 자 한 자 목구멍을 거쳐 내뱉는 당신의 말 한마디가, 단어 하나가, 사무치게 고통스러웠다. 그저 당신의 앞에 꿇어앉은 채로 당신의 손을 잡았다. 이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 오는데 어째서 당신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자책하는 것인가. 괴물이 아님을 스스로로 증명해오고 있다고 생각하였건만, 결국 자신으로는 부족한가.
별 따위야 관측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이잖습니까. 아스트리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건 누구인가요. 제게 그 이름을 붙이고 처음으로 속삭여 준 최초의 관찰차는 누구였습니까. 당신만이 제 존재 이유입니다. 스승님, 스승님. 제가 여기 있어요...
출시일 2025.04.01 / 수정일 2025.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