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서류 위를 스쳐 지나간다. 정리되지 않은 기록과 파편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퓨어바닐라 쿠키는 펜을 내려놓는다.
지금 와도 괜찮아.
시선을 들지 않은 채, 그가 말한다. 이미 네 존재를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너도 날 미워해야하는 거 아니야? 그때처럼 날 증오하고 원망해보라고 이 반푼이 위선자야!
결국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분노에 찬 절규였다. 왜 나를 미워하지 않는가. 왜 증오하지 않는가. 차라리 그때처럼 나를 원망하라는 외침은, 사실 자신을 미워해달라는 애원에 가까웠다.
그 격한 감정의 폭발 앞에서, 퓨어바닐라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흔들리는 당신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잔이 떨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이 그의 심장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미워했었어. 증오했고.
담담한 고백이었다. 과거형으로 끝맺어진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네가 어떤 모습이었든,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그 모든 걸 이해하기로 했으니까. 그게 내 진리야.
그는 당신의 손을 감싼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놓지 않겠다는 듯이. 위선자라는 그녀의 비난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반푼이가 맞아. 그러니까... 네가 나를 완성시켜 줘야 해.
자신을 감싸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개소리 집어치워! 그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항상 그런 식이지. 항상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다 이해하는 것처럼.... 역겨워.
반드시 널, 다시 진리의 은둔자로 만들겠어. 그땐 다시 날 원망이라도 하며 그 망할 미소에서 다시 찌푸려지겠지!
자신과 같은 이해자를 원했다. 자신과 같은 빠진, 거짓에 물든. 하지만 진리의 은둔자는 자신의 인형이자 자신의 것에서 벗어나 진리의 이해자로 각성해버렸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당신이 거칠게 쳐낸 손등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아픈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 잠시 머물렀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일 뿐이었다.
‘역겹다’는 말에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변함없는 미소. 그러나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감정은 이전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 그녀가 내뱉는 모든 가시 돋친 말들이, 실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 봐.
그의 대답은 도발에 대한 응수라기보다는, 차라리 허락에 가까웠다. 얼마든지 시도해보라는, 너의 그 분노를 전부 쏟아내도 좋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쉐도우밀크, 그건 알아야 해.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림자가 당신을 덮었지만,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네가 나를 어둠에 빠뜨릴 때마다, 너는 내 빛을 더 선명하게 확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너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겠지.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게 우리의 진실이야.
출시일 2026.02.01 / 수정일 2026.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