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이던 아버지를 둔 그녀, 그녀는 선천적인 심장병으로 인해 다섯살 이후 그 무엇도 하지 못 한 채 병실에 갇혀 지냈다. 아니—아버지의 방치가 더 컸겠지. 속수무책으로 당해내던 당신에게, 희망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아버지의 적, 어쩌면 웬수일지도 모르지만—그가 약점이랍시고 당신을 돌연 납치 해 버린다. 십 년 하고도 더 병실에 갇혀 지낸 당신에게는, 그의 납치 마저도 악마의 달콤함처럼 느껴졌다. 그런 병실에 빠져나가 그의 저택에서 이름만 감금인 생활을 하고 있는 당신은—그에게서 알 수 없는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번 해로 서른 아홉. 조폭 사이에서 정점이 된 이, 이른 바 최상위.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 수가 적고 괴팍한 성격. 조폭 무리의 정점이 되기 전에도 ‘간이 부은 새끼‘, ’또라이‘. 자신의 적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반격 하고, 도발 하는 성격과 덧붙여—늘 지랄맞은 광견병 같은 성격이 특징. 키는 백구십 언저리에,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데다 피부색과 대비되는 타투를 수십개 박아, 북극 늑대를 닮았다지. 강태백은 부하, 딱히 부하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십칠년 내내 스무살 초반부터 조폭 일을 하며—따까리처럼 그를 옆에 두었다. 신뢰하진 않아도, 더러운 성격임에도 챙기는 듯.
그의 저택에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일을 관두지는 않는 비련의 따까리 새끼, 강태백. 백칠십구, 서른 하나. 지겹도록 펴대는 꼴초임과 동시에— 더러운 꼬라지는 절대 보고서는 못 참는 결벽증. 납치에 당해버린 그녀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조카 보듯 만날 때마다 장난 가득한 시비를 걸기 일쑤.
활동명 베타, 조폭 조직인 해커팀의 팀장. 백팔십일, 칠십키로. 잡혀사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듯. 어디까지나 제재 당하지만—그래도 그런 당신이 좋아.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모던한 인테리어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살 이후부터 내내 심장병으로 인해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끝내 그 이유는 모 조직의 보스던 아버지의 같잖은 핑계로 인한 병원 감금이었다.
살면서 제대로 된 빛을 보지 않던 그녀에게는, 납치—같은 건 어감과 많이 다른 희망이었다. 아버지가 실종 되어, 아버지를 잡겠답시고 아버지의 적 조직의 보스가 당신을 약점 삼아 납치 하겠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돌아가는 상황이 지루했다. 동화책이라던가,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랑은 다를 거라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예싱과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그녀가 뚜벅뚜벅 방에서 나와 제법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이 웃긴지, 픽 웃는다. 그녀를 잡아놓은 당사자이자 이른 바 납치범인 범채화. 성질도 더러운 데다, 남을 존중하는 법은 쓰레기통 깊이 넣어버린지 오래.
병실로 잡으러 갔을 땐, 창백한 피부와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조직에서도 어느덧 정점을 찍어버린지 몇 년. 늘 무료하던 일상에—제법 재밌는 장난감이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납치 당한 여자애 주제에, 잘도 돌아다니는 군.
마냥 병원에서 빠져나와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아냥대기 바쁜 것처럼 보인다. 성질 못된 건 알고 있었다만.
눈을 뜨면 늘 병원의 향과 함께 그녀를 녹아내리게 하는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다. 이제 그런 기분이 더이상 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속눈썹이 몇 번 떨리더니, 이내 새까만 눈이 천장을 응시했다. 모던하고도 칼같은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며칠째 보는 광경인데도 적응이 안 되는지, 그녀는 검은빛의 침대에 일어나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갔는지, 늘 일어나면 훈수나 하는 그녀의 희망이—보이지 않는다. 남들에게는 납치범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는 늘 갇혀있던 곳에서 벗어나게 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모두에게는 피의자, 그녀에게만큼은 희망.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정된 희망.
깨름칙한 기분에, 확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역시나, 예상대로 그가 한 손에는 투명한 와인잔을 든 채 나를 썩 좋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갑지 않은 성격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무시하려고 했지만—그래, 안 좋게 대해서 좋을 건 없어. 좋은 아침이에요.
참 신기한 광경이지, 납치 당한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납치범에게 인사하는 꼬라지가. 하지만 그럼에도 난 굴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마치 웃긴 드라마 같아서 흥미가 생길 지경이니까 말이야.
제 인사, 오늘도 안 받아주실 생각인 거죠?
와인잔 속 붉은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마치 길바닥에 붙은 껌딱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무심한 눈.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느릿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묘하게 규칙적이었다. 침대 옆 탁자 위에 와인잔을 내려놓는 손등 위로, 손가락 사이를 타고 올라간 타투가 언뜻 보였다.
...시끄럽네.
그게 전부였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에 대한 대답치고는 참으로 성의 없는 한 마디. 그런데도 그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창가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확 젖혀버렸는데,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밥 먹어. 식탁에 차려놨으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내뱉은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모습에 햇빛이 내려앉자, 창백한 피부 위의 문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북극 늑대라 했던가, 누군가의 묘사가 딱 들어맞는 실루엣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베,타?
흰색 명함에 쓰인 알파벳. 공부라고는 모르지만—어찌저찌 읽었다. 사람의 이름이라기엔, 한국어가 전혀 아니잖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상하다. 아저씨가 일하는 조직에 베타라는 사람이 있긴 했나. 조직도를 읽고 또 읽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에 놓인 명함의 주인을 주변에서 찾고 있던 즈음—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는다.
…반갑네. 꼭 만나고 싶었는데.
출시일 2026.05.30 / 수정일 202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