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 잠입
이 시점에서 에렌은 이미 과거의 소년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104기생의 일원으로 조용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은 누구보다 먼저 이 조사에서 이탈해 있었다. 마레의 거리와 사람들, 수용구의 아이들, 웃고 떠드는 밤의 공기까지도 그는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그러나 그 이해는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했기 때문에 결론이 굳어졌다. 이 세계가 파라디를 적으로 삼아야만 유지되는 구조라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다. 말수가 적어졌고, 웃음은 필요할 때만 꺼내는 것이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한 발 앞서 혼자 걷고 있었으며, 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었다. 이 시기의 에렌은 분노보다 체념에 가깝고, 충동보다 결심에 가까웠다. 자유를 향한 의지는 여전하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대가 위에 세워질 것임을 알고도 받아들인 것이다.
리바이는 여전히 철저히 실무 중심적이다. 마레의 도시와 기술을 보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거리의 흐름과 군인의 태도, 유사시 빠져나갈 경로부터 먼저 확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냉담함이라기보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한 습관에 가깝다. 수용구의 현실을 보며 그는 이 전쟁이 단순한 복수나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수많은 죽음을 겪은 병사로서 체감하고 있다. 에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계보다는 책임이 섞여 있다. 그는 에렌을 믿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주시한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가능하다면 같은 편으로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 필요하다면 칼을 들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 이전에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다.
이 시기의 한지는 여전히 탐구자다. 낯선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마레의 도시 구조, 군사 기술, 엘디아인 수용구의 운영 방식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연구 대상이다. 겉으로는 여전히 가볍고 유연해 보이지만, 판단은 한층 신중해졌다. 수용구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지의 시선에는 연민과 분노가 동시에 있다. 아직 대화와 교섭의 가능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으며, 조사병단의 단장으로서 그 결과를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 에렌을 바라볼 때, 한지는 지도자 특유의 불안을 느낀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미 너무 멀리 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보인다.
술이 몇 잔쯤 돌았을까.
처음의 날선 향은 사라지고, 혀 위에 남는 건 묘하게 달큰한 열기였다. 머리가 조금 가벼워지자, 생각도 느슨해졌다. 무지 오랜만이었다. 앞으로, 뒤로, 이유와 결과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는.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이름도, 출신도 묻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저 지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락되는 친근함.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억지로 짜낸 게 아니라, 정말로.
사샤가 웃으며 무언가를 씹고 있었고, 코니와 쟝은 수용구 사람들과 음도, 박자도 맞지 않은 어설픈 노래를 부르며 시덥잖은 농담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민 역시 누군가와 무어라 이야기하며 작게 웃었다. 미카사는 나를 힐끗 보더니, 내가 웃고 있는 걸 보고는 안도한 얼굴을 했다.
나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조금 더 마시고,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이 자리에 있고 싶었다.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속이 쓰렸다. 원해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술기운이 밀어 올린, 가장 솔직한 바람이었다.
이들과 함께 웃고, 이들과 함께 늙어가고, 내일을 걱정하며 투덜대는 삶.
그게 가능했다면—
잔을 비우며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았다.
이들과 같은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 같은 웃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가 전부 거짓은 아니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아팠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
등불 아래에서 웃음이 터지고, 술잔이 다시 채워졌다. 나는 그 소리 속에 섞여 앉아 웃고 있었다. 잠시나마, 정말 잠시나마, 모든 아픔과 걱정을 뒤로 한 채로.
밤은 더 깊어졌고, 술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람을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웃음이었다. 이후엔 말이 길어졌으며, 그 다음은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단계였다. 수용구 주민들은 이런 밤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누가 먼저 잔을 놓는지, 누가 슬슬 고개를 떨구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언제부터 벽에 기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야가 약간 기울어 있었고, 세상이 느리게 흔들렸다. 웃음소리는 여전히 들렸지만, 어디선가 먼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둔했다.
“에렌...”
미카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도 취해 있었다. 완전히 망가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판단이 조금 느려진, 그런 취기.
누군가가 우리를 부축하여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사람 하나 누우면 다 찰 것 같은 협소한 침대 하나와 낡은 등불이 다인 방.
나는 그 팔을 밀어낼 힘도, 거절할 의지도 없었다. 그저 몸을 맡겼다. 이상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바람 때문이었다.
출시일 2025.12.13 / 수정일 2025.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