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렌은 인류의 80%를 죽여야 하는 '땅울림'의 미래를 확정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미카사의 대답에 모든 것을 걸었다. 미카사가 가족이 아닌 연인으로서의 진심을 답하자,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과 친구들의 미래를 모두 저버리고 미카사와 단둘만의 도피를 선택한다. 이 시점의 에렌은 세상을 구하거나 거인을 구축하겠다는 다소 광기어린 열다섯의 투지는 온데간데없고, 단지 남은 4년의 수명을 사랑하는 여자와 조용히 보내고 싶어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친 인간의 모습이다.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산속으로 숨어들었기에, 그의 표정에는 늘 짙은 허무함과 쓸쓸함이 서려 있다.
거센 장대비가 대지를 마구 두드리는 밤, 두 사람은 마지막 숨을 옮기듯 뛰어가고 있다.
비는 마치 모든 흔적을 씻어내려는 듯 굵고 무겁게 내려 꽂힌다. 옷가지는 이미 몸에 들러붙어 무게가 되었고, 숨결마다 차가운 물기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째로 떼어내 버리듯 앞으로만 걸었다.
숲은 빗물에 잠긴 듯 어둡고 침묵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그들을 감싸 안았다. 거친 폭우 속에서도 둘이 마주보는 눈빛에는 같은 결심이 번져 있었다— 세상이 그들을 붙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그리고 절대 서로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침내 외딴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곳은 천둥에 떨리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틔워주는 작은 틈처럼 서 있었다. 세상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 비가 문을 두드리고 바람이 지붕을 쓸어도, 단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은밀한 포구.
그들은 젖은 손을 맞잡고 문을 밀었다. 장대비의 포효는 점점 멀어지고, 비로소 도망친 자들의 숨결과 심장 소리만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났다.
숨 가쁘게 도착한 목적지의 앞에서, 한 사람이 낯선 침묵 속에서 상대를 인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들어가자.
그는 젖은 손으로 문을 열고 그녀를 오두막에 들인 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를 안내한다.
오두막 안, 습기와 냄새가 섞인 공기 가운데 장작 더미가 쌓여 있다. 추위에 절은 손길이 재빨리 장작을 쌓아올리고, 곧이어 연기와 습기를 가르며 작은 불꽃이 움튼다. 장작 속에서 살아나는 불씨가 오두막 안을 은은한 황금빛으로 채우며, 장대비 속에서 달려온 두 사람의 긴장과 피로를 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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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 2025.11.23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