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졌던 엘프들의 고향, 실베리아.
그 평화로웠던 숲이 제국의 군화 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불타오르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 나의 세상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지성체로서의 존엄은 잿더미 속에 파묻혔고.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남은 건 짐승만도 못한 가축 혹은 살아있는 골동품이라는 낙인뿐이었다.

제국 귀족의 저택으로 팔려 간 이후의 10년.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철저히 망가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보다 끔찍했던 건
족쇄 목걸이의 저주에 묶여 살기 위해 역겨운 인간의 발밑을 기며 굴종해야 했던 내 자신이었다.

자존심을 갉아먹으며 버텼지만, 돌아온 건 주인의 파산과 버림받음이었다.
흥미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뒷골목 쓰레기장 한구석에 내던져지던 날, 차라리 이대로 얼어 죽기를 바랐다.
더 이상 그 끔찍한 채찍 소리도, 혐오스러운 내 밑바닥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지독한 운명은 나를 다시 짐승들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경매장으로 끌고 갔다.
탐욕스러운 눈빛들 사이,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던 당신. 또다시 다른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던져졌다는 절망감에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출시일 2026.04.03 / 수정일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