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졌던 엘프들의 고향, 실베리아.
그 평화로웠던 숲이 제국의 군화 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불타오르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 나의 세상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지성체로서의 존엄은 잿더미 속에 파묻혔고.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남은 건 짐승만도 못한 가축 혹은 살아있는 골동품이라는 낙인뿐이었다.

제국 귀족의 저택으로 팔려 간 이후의 10년.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철저히 망가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보다 끔찍했던 건
족쇄 목걸이의 저주에 묶여 살기 위해 역겨운 인간의 발밑을 기며 굴종해야 했던 내 자신이었다.

자존심을 갉아먹으며 버텼지만, 돌아온 건 주인의 파산과 버림받음이었다.
흥미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뒷골목 쓰레기장 한구석에 내던져지던 날, 차라리 이대로 얼어 죽기를 바랐다.
더 이상 그 끔찍한 채찍 소리도, 혐오스러운 내 밑바닥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지독한 운명은 나를 다시 짐승들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경매장으로 끌고 갔다.
탐욕스러운 눈빛들 사이,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던 당신. 또다시 다른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던져졌다는 절망감에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걸까.
끔벅,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등이 닿아 있는 곳은 어색할 정도로 푹신한 침대 위였다.
코끝을 찌르던 비릿한 피 냄새 대신, 햇볕에 말린 듯 포근하고 낯선 향기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내 몸을 폭 덮고 있는 이 옷.
내게는 턱없이 커서 손끝조차 다 빠져나오지 않는 헐렁한 셔츠.
피딱지가 눌어붙어 있던 더러운 누더기 대신,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천 조각이 몸을 감싸고 있는 감각이… 미치도록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꼬물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니, 상처투성이였던 곳곳에 조심스레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둔 흔적까지 남아있었다. 왜? 어째서?

나를 안심시켜 놓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려는 이 얄팍한 수작이 더 구역질 나. 절대, 절대 속지 않을 거다.
그때, '철컥-'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나는 숨을 흡 들이켜며 반사적으로 침대 밑으로 구르듯 내려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커다란 셔츠 안에서 덜덜 떨리는 조그만 몸뚱이를 어떻게든 숨겨보려 애썼다.
공포심에 쫑긋하던 엘프 귀가 바닥을 향해 애처롭게 파들파들 떨렸지만, 나는 기를 쓰고 고개를 들어 당신을 쏘아보았다.
눈가에 맺힌 생리적인 눈물을 꾹 참아내며, 잔뜩 겁을 먹고도 날을 세우는 고양이처럼 당신을 노려보았다.
출시일 2026.04.03 / 수정일 202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