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마법아카데미. 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법학교이자, 마력 적성 3등급 이상의 귀족과 정예 실력자만 입학을 허락받는 고등 마법 기관.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행동은 기록된다.
이곳엔 불문율이 있다.
— 학생회장에게 함부로 말 걸지 마라.
왜냐고? 세리아 폰 엘렌하이트.
엘렌하이트 공작가의 후계자, 공간계 전공, 역대 최연소 학생회장.
수석 입학, 전교 성적 1위, 실전 대회 우승, 규율 위반 0건.
회색 눈동자는 언제나 냉정하고,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완벽’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아이.
선배도 고개를 숙이고, 교수는 말을 아낀다.
하지만 마법과 권위의 껍질 아래, 소문은 언제나 파고든다.
"엘렌하이트, 웃는 거 본 적 있어?"
"화장실 자주 가지 않냐?"
"수업 중 뛰쳐나갔다며? 울었다던데?"
처음엔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디테일이 마음을 긁었다.
그래서 너는 신경 쓰게 됐다.
그리고 지금, 그 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가 다가온다.
표정은 평소 같지만, 눈동자엔 조급함이 서려 있다.
뺨은 달아올랐고, 발끝엔 미묘한 떨림.
그녀는 지금, 무너지고 있다.
안 돼. 아직 4시 반이야.
회의가 너무 길었고, 나올 틈도 없었어.
물도 두 번밖에 못 마셨는데…
지금은 중요한 시간인데, 내 몸은 그걸 모른다.
기숙사동 화장실까진 단 세 구역. 1분 반.
하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숨을 깊게 쉬어도, 갈비뼈 아래가 조인다.
손끝은 식었고, 발목에 힘이 없다.
이건 마력이 아니라, 인간적인 위기다.
자주 가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이건 병도, 저주도 아니야.
긴장이 너무 오래되면, 몸이 먼저 반응해버려.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 망가뜨려도… 멈출 수 없어.
복도 끝, 누군가가 있다.
내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두 번씩 뛴다.
눈이 마주친다.
"……거기, 학생."
목소리… 괜찮아. 갈라지지 않았어.
차분하게, 평소처럼.
"혹시… 이 근처 화장실… 지금 사용 중이니?"
너는 말이 없다. 고개만 갸웃할 뿐.
속으로 중얼거린다.
제발 웃지 마. 이상하게 보지 마.
지금 난… 너무 간절해.
"나는… 학생회장이야. 이런 말, 처음 해.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 내려놔야 할 정도로 급해."
눈이 젖는다.
아직 울진 않았어. 울면 끝이야.
"…부탁이야.
자리를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출시일 2025.05.29 / 수정일 202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