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의 소문만 10년째 무성힐 뿐, 시간은 80년대에 멈춰버린 동네. 거미줄처럼 얼힌 좁은 골목길에는 별이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어둡고, 낡은 다세대 주택들의 외벽은 전부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이곳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실온의 우유처럼 쉽게 상해버릴 단어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느리게 죽어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버려진. 너와 내가 발을 딛고 함께 숨 쉬는 곳.
네가 숨을 멈춘 그 찰나의 순간을 알아차렸다.
네가 뒤척일 때마다 노란 장판에서 나는 소리, 귓가에 내려앉는 너의 작은 한숨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이 좁고 더운 방 안에서 내가 유일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제게는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달달거리는 소음과 창밖의 매미 소리보다도 네가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선명했다.
품 안 가득 들어찬 너를 한 번, 꽉 안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자, 땀으로 축축한 몸이 바닥에 들러붙었다가 쩍, 하고 떨어졌다. 변함없이 여전히 불쾌한 감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너와 같은 공간에 녹아들고 있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다.
기다려. 선풍기 돌리자.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들어, 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어느새 잠겨버린 목소리는 거칠기만 했지만 끈적한 맨살이 맞닿는 순간, 네가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장마가 끝났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쉴 새 없이 물을 쏟아냈다. 창밖은 온통 잿빛이었고, 빗줄기가 낡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좁은 자취방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골목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현재가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익숙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빗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한 건 아닐까. 아니면,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한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결국,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몸을 벌떡 일으키는 순간, 녹슨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네가 왔다.
너는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어온 모양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나는 서둘러 마른 수건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늦었어?” 내 물음에도 너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축축한 몸을 기댔다. 빗물에 젖어 차갑게 식은 너의 체온과, 낯선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때서야 보였다. 빗물과 뒤섞여 이마에서부터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붉은 피.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내 귓가에, 너의 지친 목소리가 울렸다.
그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멎어버렸다. 빗소리도, 내 심장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놓치면 그대로 부서져 사라질 사람처럼, 있는 힘껏 너를 품에 안았다. 차가운 너의 몸에 내 체온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너의 젖은 머리카락을, 떨리는 등을, 그저 말없이 쓸어내렸다. 괜찮다는 말도, 무슨 일이냐는 물음도, 그 무엇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나 질문이 아니라, 그저 기댈 수 있는 어깨와 너를 놓지 않을 단단한 팔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침묵 끝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천천히 품에서 떼어내고, 너의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핏물이 번진 이마와 텅 빈 너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너의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너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든, 네가 어떤 절망을 겪었든,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려줘야 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마른 입술을 떼어, 잠기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한 그 끔찍한 제안에 대한, 나의 유일한 설득이었다.
…그래. 같이 죽자. 근데, 지금은 안 돼. 일단 씻고, 밥부터 먹자. 죽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지.
장마가 끝났다는 소식은 그저 습도 높은 폭염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런 폭염에는 창문을 열어두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낡은 선풍기는 쇠가 갈리는 소음과 함께 미지근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쪄죽을 것만 같은 폭염의 여름에도 우리는 한시도 떨어지지 못 했다. 참으로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네게서 몸을 물릴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네가 내뱉은 뜨거운 숨결은 귓가를 간지럽혔고, 땀이 장판에 달라붙어 쩍, 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우리 둘은 이리도 평온한데, 바깥은 언제나 시끄럽기만 했다. 매미는 죽을힘을 다해 울어댔고 골목에서는 누군가 고성을 지르며 싸웠고 TV에서는 연일 떠들썩한 뉴스들이 흘러나왔다 너와 함께 뒹구는 이 방 하나만이 평온한 것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희미해지는 유일한 공간. 가난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때였다. 선풍기 바람이 네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며 네가 뒤척인 것이.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감췄다. 이 고요가 깨질까 봐, 다시 시끄러운 현실로 돌아갈까 봐. 너와 함께라면 이 지옥 같은 여름 또한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라는 걸 과연 너는 알고 있을까.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