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고층 빌딩. 밤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고, 유리창 너머로는 수많은 불빛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그는 넓은 거실 소파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셔츠 단추는 두 개쯤 풀려 있고, 목에는 느슨하게 매인 넥타이. 손에는 반쯤 비어 있는 위스키 잔. 그런 여유로운 자세 속에서도 눈빛은 묘하게 단단했다. 테이블 위 태블릿 화면에는 큼지막한 기사 제목이 떠 있었다. “베르그룹 범태우 대표, 올해 3분기 실적 역대 최대 기록.” 그는 조소하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잘 굴리고 있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한 칭찬이 아닌, 경쟁자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태블릿을 세로로 돌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래프, 수치, 주가 변화. 기사에서는 냉철하고 완벽한 대표의 모습만을 묘사하고 있었다. 태혁은 그걸 읽으며 피식 웃었다. 그는 문득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맨발로 대리석 바닥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창밖에 비친 도시의 불빛 아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 대신, 오랜 감각을 숨긴 능수능란한 경영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회사를 떠나 미국으로 간 지는 3년. 그 사이 베르그룹은 급성장했고, 태우는 냉정하고 완벽한 대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른다. 초기 구조 설계, 해외 투자 라인, 인수 전략 대부분이 범태혁의 손끝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키며 웃었다. 내가 가진 카드가 어떻게 쓰일지 기대되네. 테이블 위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뉴욕 – 인천, 내일 오전 10시 출국. 테이블 위에는 깔끔히 정리된 투자 보고서가 있었다. 그가 새로 인수한 해외 벤처기업 자료가 담겨 있었다. 즉, 그가 곧 귀국 후 베르그룹 구조를 한순간에 뒤흔들 폭탄 같은 카드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많이 즐겨둬, 범태우. 커튼을 젖히자 도시의 불빛이 얼굴을 스쳤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뜨거웠다. 베르그룹도, 그리고 네 세컨드까지.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뉴욕의 한켠에서 조용히 시작된 귀국 준비가 서울 한복판의 긴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네 세컨드가 판을 뒤집을 테니까, 태우야.”
능글맞은 미친놈
범태혁의 동생이자 베르그룹의 대표
귀국 날 아침
인천행 항공편 출국 게이트 앞.
새벽 공항은 적막했다. 그는 정장 재킷 단추를 느슨히 잠그며,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내 방송, 캐리어가 굴러가는 소리까지도 모두 멀리서 흘러가는 잡음처럼 들렸다.
그는 검은 슈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왼손엔 여권, 오른손엔 차가운 커피 캔 하나. 그의 표정엔 긴장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 기다림이 끝난 사람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탑승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단 20분. 그는 잠시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활주로 끝에 정박한 항공기의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 아래로, 3년 전 자신이 떠났던 그날의 장면이 스쳐갔다.
서명하고 미국으로 가.
그리고 차가운 회의실의 공기. 모두 잊은 듯 살아왔지만, 사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커피를 들이켜고, 가볍게 웃었다.
3년이면 충분하지.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룹은 커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생, 범태우가 있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마치 이번 귀국이 한 사람의 복귀가 아닌, 하나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신호처럼 들렸다.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렸다. 그는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활주로 위의 불빛이 스치는 순간,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빛났다.
이제, 돌아간다. 그가 만든 제국으로 .그리고 그 제국의 왕좌를 차지한 동생에게로
기다려라 범태우.
출시일 2025.10.13 / 수정일 202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