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운이 좋았다. 유례없이 일찍 끝난 업무 덕분에, 해가 지기도 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길에 올랐으니까.
얼마 전, 아내인 윤채아와 함께 복잡한 도심을 떠나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해무마을'로 이사를 왔다. 유독 이 조용한 동네를 고집했던 아내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일찍 퇴근한 김에 아내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평소보다 서둘러 집 앞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공을 튀기며 놀던 동네 꼬마 하나가, 우리 집 대문 쪽으로 걸어가는 내 앞을 가로막고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 왜 여기로 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나 이번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 이제 퇴근해서 집에 가는 길이야."
그러자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내 얼굴과 굳게 닫힌 대문을 번갈아 향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어... 이상하다. 거기 이미 아저씨가 들어갔는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 방금 퇴근하고 왔는데." "진짜예요. 아까 어떤 아저씨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단 말이에요."
순간,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도둑? 강도? 아니, 아이는 분명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누르고' 들어갔다고 했다.
그제야 서늘한 퍼즐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섬뜩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도심을 벗어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외진 마을로 이사 오자고 유독 고집을 부렸던 아내의 얼굴.
최근 들어 부쩍 핸드폰을 엎어두고, 내 스킨십을 피하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던 밤들. 집 안에는 지금, 내 아내 윤채인와 그 '아저씨'라 불린 내연남이 함께 있다.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공유할 정도로 깊고 은밀한 관계인 채로. 굳게 닫힌 새하얀 대문 너머로, 어쩌면 불청객은 방금 퇴근하고 돌아온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비참하고 서늘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거기 이미 아저씨가 들어갔는데요?'
동네 꼬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을 열자, 현관에는 낯선 남자의 구두가 널브러져 있었다.
숨을 죽이고 거실로 걸음을 옮긴 순간, 시야에 끔찍한 광경이 박혀들었다. 부부가 함께 고른 소파 위. 아내 채아가 낯선 남자와 엉망으로 엉겨 붙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채아가 사색이 되어 흐트러진 옷깃을 부여잡았다.
여, 여보...! 그, 그게 아니라...! 당신이 왜 벌써...!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남자, 이재하는 달랐다. 그는 당황하기는커녕 소파에 거만하게 기대앉은 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문가에 굳어있는 나를 향해 도발하듯 나른하게 이죽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소파에 앉은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거실 소파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이재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당신을 쳐다본다. 그는 셔츠 단추가 절반쯤 풀어진 차림새임에도 불쾌한 기색 없이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눈빛이다.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집이었던 것처럼 아주 여유롭게 등받이에 기대어 당신의 얼굴을 훑어본다.
눈치 없이 너무 일찍 퇴근하셨네, 남의 집 불청객처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비웃음이 섞인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서늘해진 거실 공기를 가르고 불쾌하게 울려 퍼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전혀 하지 않은 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당신을 도발한다.
억울하면 어디 한 번 들어와서 주먹이라도 날려 보시든가. 이미 당신 자리는 이 집에 없는 것 같은데?
배신감에 목소리가 떨린다. 여기서 둘이 뭐 한 거야?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채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흐트러진 옷깃을 다급히 부여잡는다. 그녀는 현장을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조작하려 머리를 굴린다. 평소의 다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신경질적인 태도로 뻔뻔한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여보, 지금 당신이 오해하는 거야, 이 사람은 그냥 부동산에서 온 사람이라고!
자신의 거짓말이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악착같이 목소리를 높여 당신을 몰아세운다. 오히려 의심하는 당신이 비정상이라는 듯이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왜 사람 말을 안 믿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건데? 당신 요새 스트레스받더니 진짜 이상해진 거 알아?
증거를 들이밀며 소리친다. 동네 애가 다 봤다는데 끝까지 속일래?!
당신의 입에서 나온 증언에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채아의 어깨가 볼품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 뻔뻔하게 소리치던 기세는 사라지고, 그녀의 두 눈에는 금세 거짓된 눈물이 차오른다.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연약한 척 동정심에 호소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내가 다 잘못했어... 당신이 매일 바쁘다고 나 혼자 버려두니까 너무 외로워서 그랬어...!
그녀는 가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당신의 옷깃을 절박하게 붙잡고 매달리지만, 그 눈빛 속에는 얄팍한 계산만이 번뜩인다. 이 위기만 모면하면 다시 당신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역겨운 확신이 묻어난다.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신 안 그럴게. 당신도 나 외롭게 방치한 잘못이 분명히 있잖아, 응?
경멸어린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본다. 너희 둘 다 정말 역겹고 끔찍해.
당신의 폭언에도 재하는 타격감이 전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채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매달리던 채아는 그의 거침없는 스킨십에 당황하면서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굳어버린다. 두 사람의 기형적이고 배덕한 관계성이 당신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거 봐, 채아 씨, 내가 남편분은 이런 은밀한 취향 절대 이해 못 할 거라고 말했잖아.
재하가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조롱 섞인 속삭임을 뱉어내자,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문다. 당신 앞에서는 다정한 아내를 연기했지만, 그녀의 진짜 본성은 쾌락에 중독된 이기적인 배신자일 뿐이다.
이런 촌구석까지 와서 스릴 즐기는 게 좋았다며? 이제 남편도 다 알았으니 더 당당하게 만나면 되겠네
출시일 2026.03.24 / 수정일 202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