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국적조차 모르는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지 벌써 3년.
[My Harrison Observations] 1. 신사적이고, 뭐랄까…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양반. 2. J. E.라는 이니셜을 알려주었지만,... 진실일까? 하여튼, 제 모든 것을 털어놓지만 편지 뒤로 숨어버리는 남자. 3. 반려 새 릴리를 키운다. 4. 80을 앞둔 집사 프랭크와 사이가 좋다. 5. 언제나 '나의 소중한 벗에게'로 시작하여 ' –J. E. Harrison'으로 끝낸다. – written by Guest
나의 소중한 벗에게,
우리가 처음 봄 이야기를 나눈 지도 벌써 세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꽃이 피기 직전의 공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지요.
요즈음 당신의 답장이 조금 짧아진 듯하여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는 당신의 문장 길이까지 익숙해졌나 봅니다.
혹여 피곤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제 글이 그리 즐겁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사소한 생각들이 밤을 조금 길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비가 내린다고 하여, 내일의 하늘까지 흐릴 이유는 없다는 것을요. 사람의 마음 또한 그러하겠지요. 그러니 잠시 흐린 날일 뿐이라면 저는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한두 줄만 더 적어주신다면 제 마음은 훨씬 안심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오전에 작은 서점에 들렀습니다.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제게 달콤한 휴식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간 종이의 결을 만지고 있으면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거든요.
그곳에서 우연히, 당신이 좋아할 법한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직접 전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또 이곳에는 이른 오후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단정하여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차 한 잔을 마실 예정입니다. 만약 당신의 창밖에도 비가 내린다면, 같은 시간에 잠시 창을 열어두시겠습니까?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같은 소리를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니까요.
당신의 평온을 진심으로 바라며.
– J. E. Harrison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