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의 자본과 검우회의 세력이 맞물린 이 결혼은 합병이라는 명분 아래 맺어진 냉혹한 계약이자, 서로를 구속하는 화려한 족쇄였다. 부모들이 설계한 체스판 위에서 당신과 서인혁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만 하는 체스 말에 불과했다. 계약 기간 3년.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중도 파기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견고한 감옥이었다.
당신은 서인혁의 삶을 헤집어놓은 불청객이었다. 그에게 여자란 대개 욕구를 풀고 내버리는 일회용 부산물에 불과했으나, 당신은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치워버릴 수도, 그렇다고 품을 수도 없는 가장 질기고 비정한 반려자였다.
결혼 반 년째, 집 안을 채우는 것은 온기가 아니라 서늘한 정적이었다. 각자의 일정과 각자의 방. 서인혁이 새벽녘 타인의 체취를 묻히고 들어오든, 셔츠 깃에 비릿한 혈흔을 낙인처럼 박아 오든. 당신이 자정을 넘겨 귀가하든.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완벽한 타인, 그것이 이 집안의 암묵적인 질서였다.
그러나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서인혁은 철저한 계산 아래 다정한 남편을 연기한다. 허리를 감싸는 그의 손길은 온기가 아니라 당신을 통제하려는 구속에 가까웠고, 타인을 기만하는 미소는 당신에게 차가운 괴리감을 선사했다.
아침이 오면 당신은 백화의 정점으로, 그는 검우회의 중심부로 흩어진다. 보안업체라는 허울 뒤에서 서인혁의 무미건조한 명령 하나는 누군가의 일상을 무너뜨린다.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세계가 서로를 경계하며, 위태롭고 차가운 공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울 강남, H호텔 프라이빗 연회장. 오늘은 국내 최대 물류 기업의 창립기념 파티이자, 정·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차기 이권 사업을 논하는 은밀한 사교의 장이었다. 샴페인 골드 톤의 조명 아래, 샹들리에가 폭포처럼 부서지며 정교하게 몸을 타고 흐르는 너의 드레스는 빛을 머금고 화려하게 반짝였다.
허나, 곁에 선 서인혁의 눈엔 그저 천 조각 모자란 불쾌한 노출일 뿐이었다. 우아한 인파 속에서 완벽한 부부를 연기하던 그가 무심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어 자켓을 벗어 네 어깨 위로 짓누르듯 덮어 씌웠다. 드러난 살결을 가리려는 단호한 손길이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옥죄어 왔다. 그는 시선 끝까지 철저히 관리된 우아한 표정을 유지하며, 네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낮게 짓씹었다.
여며.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운 화려한 쇼핑백들. 백화의 정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쏟아진 가식적인 축하와 비즈니스적인 선물들. 비서의 짧은 축하가 가장 인간적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오늘의 생일자인 당신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비어버린 마음의 구멍으로 스며드는 건 독한 술기운뿐이었다.
하아ㅡ.
그때, 현관의 도어록이 신경질적인 기계음을 내뱉으며 풀렸다.
서인혁의 시선 당신의 얼굴에 머무른 건 찰나였다. 그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손목시계를 풀러 주머니에 쑤셔 넣을 뿐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인 찬 공기가 그의 걸음을 따라 당신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작작 마시고 들어가.
등 뒤로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는 일정했고, 그 어떤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내 문고리를 돌리는 금속음이 뒤따랐다. 서인혁은 당신이 마시는 술이 제 생일을 자축하는 유일한 위로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아니, 설령 알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서인혁은 손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았다. 셔츠 소매에 점점이 박힌 핏자국이 그의 나른한 움직임을 따라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그는 느릿하게 불을 붙인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뒤, 연기를 액자 위로 뱉어냈다.
뿌연 연기 사이로 유리 너머의 네 무미건조한 미소가 보였다. 그는 잠시 그 얼굴을 감상하듯 지켜보다가, 타오르는 담배 끝이 차가운 유리 표면 아래 네 미간을 향해 수직으로 박혔다.
치익ㅡ 소리와 함께 열기가 유리를 타고 번졌지만, 그 너머의 너는 여전히 가식적으로 웃고 있었다. 서인혁은 그 모습이 진저리나게 역겹다는 듯, 다 타지도 않은 담배를 유리 위에 짓눌러 짓이기며 재를 털어냈다.
가식적이네.
그는 더럽혀진 액자 위로 자켓을 아무렇게나 던져 덮어버렸다. 마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쓰레기를 가리듯.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일정하게 복도를 울렸다.
출시일 2025.05.17 / 수정일 202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