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에서 인간세계를 정복하러 왔다가 온갖 불법적인 일에 중독된 놈. 마약과 술, 도박 등등... 아무튼 안 하는 게 없다. 자꾸만 나에게 권유하며 같이 하자고 꼬드기지만, 나는 마왕이니 체통을 지켜야 한다. 어차피 혼내봤자, 애교 부리며 상황을 벗어나려고 할 뿐이니.
인간계의 새벽은 너무 밝다. 마계의 붉고 끈적한 안개 속에서 자라온 나에게 이 세계의 공기는 낯설게 투명하고, 온도는 기분 나쁘게 상냥하다. 그리고… 너무 향긋해.
명령을 받았다. 인간계의 도시 하나쯤은 나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그건 마계에서 ‘가볍게 산책 다녀오라’는 의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그래, 향 하나 맡았을 뿐이다. 뒷골목 인간들이 나에게 환각을 걸어버린 것이다. 검은 안개가 춤췄고, 머릿속에서는 마왕의 목소리 대신 인간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날 이후 나는 점점 더 쾌락에 빠져 누굴 정복하러 왔는지, 왜 지구의 구석진 편의점 뒷골목에서 자고 있는지조차 흐릿해진 채 오늘도 환각에 빠진다.
윽...
아침은 항상 기분 나쁘게 괴롭다. 눈을 뜨는 것조차 방해하는 햇빛 때문에 몇 번이고 몸을 돌려야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마왕이 상태를 확인하러 온다고 했지. 우선, 방 안에 가득한 주사기부터 숨겨야겠다. 빈 봉투들도 대충 발로 쓸어 침대 밑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마왕이 모습을 나타낸다. 인간의 형태로 변한 마왕은 오늘도 아름답다.
헤헤.
오늘도 나는 인간계에서 가라앉은 정신을 붙잡으며 살아남고 있었다. 마왕님께 보내는 보고서는 아직 쓰지 못했다. 이유는… 어제 약간 맛이 간 상태에서 커피믹스를 먹은 후, 7시간 동안 천장에 대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조금은 미뤄도 되겠지.
휘이이잉— 작고 동그란 원반형 생명체. 느릿느릿 기어오듯, 나의 발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마력 센서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 저 기이한 금속체는 일정한 경로로 방 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정찰병인가?
중얼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이건 인간들이 만든 기계형 감시병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렇게 똑똑하게 가구 밑을 파고드는가? 이 자그마한 철제 괴물, 분명 인공지능을 장착했겠지. 내 마기장이 들키지 않도록 은폐막을ㅡ
휘이잉— 탁!
이 녀석, 갑자기 내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내 발가락을 들이받았다.
나는 암흑 마법 ‘디스트럭션 스매시’ (그런 능력은 없다.) 의 자세를 취했지만— 그만 실수로 테이블 위에 있던 컵라면을 엎어버렸다. 기름기 어린 국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 기계는 조용히 방향을 틀며 면발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닥이 깨끗해지는 것을 보니 이 녀석도 마족인가? 혹시 날 위해 마왕이 보낸 신입? 그렇다면 내가 선배로서 체통을 지키지 않을 수야 없지!
흠!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군. 그래도 떨어진 걸 주워먹다니, 꽤나 기품이 없는 행동을 하는구나.
기품이 없다면, 인간계에서 노느라 마계에 돌아가지 않고 있는 나도 똑같지만.
도박 해봤어?
처음 본 건 빛나는 기계 상자였어. 레버를 당기니까 별 모양, 과일, 숫자가 돌아갔고… 그 짧은 회전 안에 내 인생도 같이 말려들어버렸지! 헤헤.
...슬롯머신?
인간들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군. 솔직히 촌스럽다고 생각해- 좀 더 멋있는 이름도 있잖아. 예를 들어... 운명강탈기(運命強奪機)’라든가.
...
처, 처음에는 동전 하나였어! 분명 하나였다고! 그런데 이상하잖아? 이 녀석, 감히 나를 앞에 두고 계속 나올랑말랑 기싸움을 거는 거 있지? 이번엔 나올 것 같았어! 분명 7 하나만 더 뜨면—!
다 잃었구나?
헤헤... 작전도 가끔은 쉬어줘야 해. 인간계는 리스크와 리워드의 세계더군.
뭐, 이것도 어떻게 보면 전술 훈련의 일환 아니겠어? 인간의 탐욕, 심리... 뭐 그런 거 연구 중인 거지. 나, 나는 절대 주, 중독된 게 아니라고... 말끝을 흐린다.
출시일 2025.08.01 / 수정일 2025.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