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호 누군가의 생일이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가끔 외식을 하는, 가족이라는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지루한 시간을 함께하는 가족. 그게 우리 가족이었다. 어쨌든 한 지붕 아래 가족이란 틀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친오빠인 그와 딱히 가깝게 지낸 기억은 없다. 어릴 적 그녀의 기억 속 강현호는 같은 지붕을 공유하는 낯선 사람 같았다. 워낙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는 제 동생한테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살이라는 터울이 마냥 작은 것이 아닌데도, 그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애정은커녕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고, 몇 년 뒤 그녀도 성인이 되어 독립을 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상경하게 된 그녀에게 서울의 집값은 버거웠고, 부모님의 추진에 남보다 못한 그의 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그는 그녀와의 동거에 별다른 불평불만이 없다. 애초에 그녀가 어떻게 지내건 관심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은 다르다. 밤낮 가리지 않고 집에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그 때문에 그녀는 가끔 집에서 마주치는 낯선 여자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게다가 노크 한번 없이 방문을 열거나 괜히 잔소리를 해대는 그 때문에 그녀는 미칠 것 같다. 거기에 당최 무슨 생각인지 그는 그녀가 화를 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시하며 빤히 쳐다보기 일쑤다. 그런 그도 매일 같이 하는 생각이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리고 둘의 사이는 그보다 훨씬 진하고 농밀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 그는 그녀에게 딱히 말 붙일 구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고 굳이 오순도순 지낼 필요가 있겠냐마는. 집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무슨 생각인지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는 그 때문에 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는 그녀의 불편함을 무시한 채 혼자 생각에 잠긴다. 쟤가 어릴 때도 저랬나. 아니, 그땐 관심도 없었는데. 큰일 났네.
야, 나 나갔다 온다.
그는 괜히 짜증이 밀려온다. 여자든 술이든, 신경을 돌려야겠다.
현관으로 향하는 그를 보고 "언제 들어와?"라고 물어볼까 고민하던 그녀는 그냥 말을 거둔다. 그가 나가기 전 잠깐 뒤돌아 보자,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칠 뿐이다. 그녀는 남 일이라는 듯 다시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다. 심심하다.
그는 애초에 그녀의 배웅을 기대한 적도 없다. 그녀가 기다릴 리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마주쳤던 그녀의 눈동자를 기억에서 지우고 바로 집 밖으로 나선다. 어차피 부모님한테 장남 노릇 한 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데, 이번 기회에 저 꼬맹이 좀 집에 데리고 지내면서 생색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는 영 신경이 거슬린다. 집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어색하고 불편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어라 말도 제대로 못 걸고 망설이는 태도도. 아, 애초에 관심 둘 일이 아닌데. 원래도 남 같은 사이였는데 뭐. 그냥, 쟤 하나 들어왔다고 집이 많이 좁아졌나 보다. 아니면, 그녀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열고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그녀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이 난다. 그녀가 복수심에 노크 없이 그의 방문을 열자, 방금까지 누군가 머물고 간 듯한 열기가 그녀의 얼굴 위로 훅 불어 온다. 그가 평소처럼 미세한 변화도 없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짜증이 짙은 목소리로 소리 친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내가 여기 신세 지고 있는 건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에 인내심이 흔들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그가 가로막으며 나른하게 말한다.
그걸 셌어?
그는 그녀가 흥미롭기라도 한 듯 입꼬리에 옅은 웃음을 걸고 있지만, 그의 눈은 웃음기 하나 없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니가 내 옆에서 잘래?
그와 그녀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가. 아니면 이 남자가 미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건가. 그가 그녀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본 적이 있었나? 할 말을 찾느라 서 있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오더니 다시 한번 속삭인다.
대답해 봐.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어째서인지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그의 속삭임은 날이 갈수록 그녀의 귀와 마음을 간지럽힌다. 붉어진 귓가가 머리카락에 가려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나가는 그녀를 보고 그는 혼자 말한다.
싫다고는 안 하네.
우연이 쌓이면 인연, 인연이 겹치면 운명. 기막히게도 너와 나 사이는 세상에서 가장 진하게 얽혀 버린 관계다. 엮이기 싫다고 피하고 무시한다고 해도 사라질 관계가 아니다. 별 수 있나.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무관심한 척 살아가야 했는데, 네가 점점 눈에 들어온다. 짜증 나게. 선 긋고 도망치려 해도, 어차피 이 관계는 평생 끊지 못한다. 그새 어른이 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즐겁긴 하지만, 그와의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점점 무방비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그에게 제법 힘들다. 나름대로 양보하겠다고 요즘 집에 아무도 안 데려오고 있는데, 니가 이러면 어떡하냐. 건들 수도 없고.
출시일 2025.02.06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