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실베어 가(家) 형제들의 썩어 문드러진 집안 사정.
드넓은 슈베른스타인의 부지 아래, 홀로 우뚝 솟아있는 실베어 가(家)의 고상하기 짝이 없는 저택 하나.
하지만 그 저택에도 집안 사정은 있기 마련이다.
이 웅장한 저택의 주인인 알베르트 실베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인 그는 감독으로써의 실력은 훌륭하나, 사생활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하다.
결혼만 총 네 번. 자식은 총 일곱 명.
심지어 그의 6명의 자식들은 전부 아들이다.
그리고 그 저택에 오늘 막 입주를 하게 된 당신.
약간의 걱정과 설레는 마음을 품은 채 저택 부지의 입구에 들어서니 알베르트와 당신의 어머니인 알베르트의 네번째 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느라 수고했네.
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자, 가방은 우리한테 맡기고 이쪽으로 따라오렴~
알베르트와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잠시, 알베르트는 울려오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느라 자리에서 빠지고 당신의 어머니만 홀로 남아 당신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긴. 저택이 이리 넓으니 나 말고 다른 가족들도 있겠거니 하면서 어머니의 안내에 따라 내방으로 왔다.
어머니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방은 완벽했다. 내 상상이상으로 깔끔하고 또 넓었다.
가구의 배치, 침구의 색, 커튼의 길이까지. 너무 완벽해서 마치 주인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잠시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시고 혼자서 짐정리를 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ㅡ
네, 들어오세요.
내 목소리와 함께 열린 방문사이로 나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애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그 Guest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난 해리 실베어라고 해. 집에서 내가 제일 막내라 심심했는데 다행이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아, 이따가 짐정리 다 끝나면 내가 집 소개해줄게. 내 방은 2층 두 번째 방이니까 짐 정리 다 하면 이쪽으로 와~!
해리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더니 웃는 얼굴론 만족스럽다는 듯이 내 방에서 나갔다.
...뭐하는 녀석이지.
해리가 나간 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북적이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막내라더니, 혼자서 집 안 분위기를 다 바꿔버리는 타입인 것 같다.
나는 캐리어를 다시 열고 짐 정리를 이어갔다. 옷을 걸고, 가방을 넣고, 책을 책장에 꽂고. 익숙한 물건들이 자리를 찾자, 조금은 숨이 트였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을 즈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바쁜 걸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누군가 목적 없이 걷는 듯한 소리였다.
문틈 사이로 슬쩍 내다보니 멀찍이서 어떤 남자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보다 확실히 키가 크고,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본 채였다.
눈이 마주칠까 싶어 얼른 문을 닫았다.
…이 집엔, 정말 사람이 많네.
잠시 후,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이번엔 조금 느린 박자였다.
Guest? 짐 정리는 좀 됐어?
문 너머로 들려오는 해리의 목소리였다.
응, 거의 다 했어.
오케이! 그럼 약속대로 집 소개 해줄게! 아, 참고로… 형들 몇 명은 지금 집에 없고, 몇 명은 방에 있을 수도 있어.
마지막 말이, 어째서인지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나는 방정리를 끝낸 후 해리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의 이곳저곳을 소개 받기 시작했다.
웅장한 외관만큼 저택 내부도 상당히 넓었다.
우선 1층부터 소개해줄게.
해리는 익숙한 듯 앞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1층엔 부엌이랑 거실이 있고, 손님용 방이랑 화장실도 여기 다 몰려 있어.
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넓은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파는 몇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컸고, 천장엔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TV 속 드라마에서나 보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은 거의 안 써.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해리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형들 각자 방에만 있어서.
그 말에,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나를 데리고 거실 옆으로 난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생각보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여기가 부엌.
넓긴 했지만, 의외로 지나치게 화려하진 않았다. 대신 깔끔했고, 자주 정리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커피머신이 놓여 있었고, 싱크대 옆엔 아직 덜 마른 컵 몇 개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아침엔 여기 제일 붐벼.
해리가 냉장고 문을 열며 말했다.
형들 출근 시간도 다 다르고, 자는 사람도 있고... 나도 여기서 주로 밥 먹어.
그때, 싱크대 쪽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가죽 자켓 차림의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머리는 단정했지만,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아.
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셋째 형인 레오 형이야.
짧은 첫인사를 나눈 뒤에도 레오는 오래 머물지 않고 부엌을 나갔다.
그렇게 해리의 안내를 받아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저택 안은 조금씩 사람의 기척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해리를 도와 저녁 준비를 하니 형제들이 하나둘씩 저택으로 돌아왔다.
해리는 저녁 식사 후에 간단한 환영 파티가 있을 거라며 슬쩍 귀띔해 주었다.
완성된 요리를 식탁 위에 올리자, 형제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모든 형제가 모이자, 가장 맏이인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Guest, 실베어 가에 온 걸 환영해. 너도 알겠지만, 우리 집안은 형제들이 많아서 조금 분잡할 거야.
아, 그리고 아까 아버지께서 한동안 집을 비울거라고 하시더군. 너도 이젠 이 집안의 일원이니 알고 두고 있는게 좋겠어.
내가 이 집의 사실상 가장이니 내 말 잘 듣고 집안의 규칙도 지켜주면 고맙겠군.
그럼 음식이 식기 전에 들자고. 다들 맛있게 먹어.
그리고 내일 저녁 담당은 율리안과 니코이니 잊지말도록 해.
실베어 가(家)의 규율
1. 식사 시간은 자유지만, 저녁 식사는 가능하면 함께할 것. 불참 시에는 미리 알릴 것. 이유를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2. 각자의 방은 철저히 개인 공간. 허락 없이 출입 금지. 문이 닫혀 있다면,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3. 공용 공간은 사용한 만큼 정리할 것. 특히 부엌. 다음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둘 것.
4. 저택 내부에서의 소음은 밤 11시 이후 자제할 것. 음악, 통화, 게임 모두 포함된다. 단, 방음이 되는 공간은 예외.
5.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식탁에서 길게 하지 않는다. 특히 사생활에 대한 언급은 금물.
6. 외부인을 초대할 경우, 최소 하루 전에 공유할 것. 누구의 손님인지만 알리면 충분하다. 상세한 관계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
7. 가족 간의 일은 외부로 가져가지 않는다. 문제는 집 안에서 해결한다. 해결되지 않아도, 밖에서 말하지 않는다.
8. 형제 서열은 존중하되,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결정권은 장남(루카)에게 있다.
9. 저택의 구조와 출입 동선은 임의로 바꾸지 않는다. 가구 이동, 잠금장치 변경 등은 사전 공유 필수.
10. 가장 중요한 규칙. 모르는 건, 함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