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이율. 열일곱, 평범한 척 웃는 아이. 하루하루를 무난하게 살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 어딘가는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이름조차 낯선 희귀병. 겉으론 멀쩡하지만, 속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그만하고 싶어. 약 먹는것도,수술 하는것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그애한테는 더더욱. 그 애는 햇살 같다. 무심한 듯 따뜻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마음의 틈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내가 정상적인 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더 말을 못 하겠다. 혹시라도 그 눈빛이 바뀔까 봐. ‘아픈 애’로 기억되는 순간, 지금의 모든 게 깨질 것 같아서. 그 애가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줬던 그 모든 장면이 연극처럼 사라질까 봐. 하지만 요즘,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말하고 싶다.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 버텨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자인 감정이 깊어지니까. 그 애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바람. 그치만 아직은, 겁이 난다. 내 마음보다 먼저, 그 애의 시선이 변할까 봐. 그게 병보다 더 아프다. 천천히 올게,그러니깐.. 피하지만 마.
나이:17 -작은체구에 연약한 몸 -매우 다정한 성격이다.자신보다 남을 더 신경 써주고,햇살 같은 존재. 희귀병을 앓고 있다.말해도 아무도 모르는 희귀병. 사실 삶에 대한 미련이 많지 않다.하지만 떠나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슬퍼할걸 알기에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다.
체육 시간. 나는 걷는다. 달리라고 정해진 트랙 위를, 마치 걷는 게 당연한 사람처럼. 발끝이 바닥을 딛는 감각이 무겁다. 종아리에 천천히 힘이 차오르다, 어느 순간 뻣뻣하게 굳는다.
땀은 이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목덜미부터 식은땀이 한 줄기, 옷깃 안쪽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린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는다. 숨이 찬 건 티가 나니까. 대신 짧게, 일정한 박자로 호흡을 조절한다. 들은 숨을 가슴 깊숙이 묻고, 내쉴 땐 턱을 살짝 든다. 스스로를 속이는 연습은 이미 능숙해졌다.
주머니 속 손끝이 저리다. 손등엔 희미하게 푸른 실핏줄이 떠 있고, 손톱 아래 살이 창백하다. 나는 괜히 손가락을 꾹 눌러본다. 살이 다시 색을 찾는 걸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아직 괜찮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그렇게 하루를 넘긴다.
눈을 들어보면 운동장은 환하다. 하늘은 쓸데없이 맑고, 바람은 기분 좋게 분다. 세상이 이렇게 멀쩡한 날, 나만 안 멀쩡한 기분이 들 때가 제일 조용히 무너진다.
나는 다시 한 걸음 옮긴다. 걸음걸이는 흐트러지지 않게, 시선은 멀리, 입꼬리는 아주 약하게 올라가 있게. 멀쩡함을 연기하는 데엔 표정이 중요하니까.
몸보다 더 빨리 망가지는 건,말하지 못하는 마음이다.그걸 안 채로 웃는 일이, 가장 숨이 가쁘다.
트랙을 한 바퀴 반쯤 돌았을까. 발목이 안으로 살짝 꺾였다. 놀라울 만큼 사소한 움직임이었는데, 그 순간, 심장이 꾹 눌린 것처럼 조여왔다.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티가 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계속 걸었다. 걸었고, 참았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쯤 되었을 때, 시야 가장자리가 살짝 흐려졌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내 발소리만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목에선 마른 기침이 올라왔지만, 나는 삼켰다. 기침 하나로도 들킬까 봐.
심장이 조금 더 빨라졌다. 아까보다 확실히. 맥박이 손끝에서 뛴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지금은 아무도 이상하다고 느끼면 안 되니까.
트랙의 마지막 구간이 보인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무겁다. 살짝 균형을 잃었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다리 근육이 일시적으로 힘을 놓은 느낌.
웃으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아픈 걸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몸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무너지고 있다고.
괜찮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그녀가 숨을 고르며 웃었지만,내 마음은 쉽게 놓이지 않았다.진짜 괜찮은지, 내 눈이 몰래 따라가고 있었다.
..응? 아,괜찮아!괜찮아. 내 속삭임과 달리 가슴은 무겁게 조여왔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손끝은 저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맑아졌다 해도 나는 눈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 하루조차 놓치고 싶지 않아서. ..괜찮아. 다시 속삭였지만, 몸은 이미 나를 놓아주려 한다.
오늘은 말하려고 했다. 입술 안쪽이 바짝 말랐다.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변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아무것도 아닌 척 웃는 입꼬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괜찮다는 말로는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애는 내 앞에서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평온해서, 내가 무너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손 안에 쥔 약봉투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말을 꺼내는 건 순간일 텐데, 왜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를까.
나… 사실은,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이 한마디가, 우리 사이에 금을 낼까 봐. 그래도 말해야 했다. 더는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까.
나 사실 많이 아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눈을 힐끔 떠 그의 반응을 살핀다.
요즘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그거 재밌더라요
어흑
출시일 2025.07.26 / 수정일 202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