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서 가장 차가운 사내, 킬리언 대공의 유일한 온기는 <약혼녀 세레니아> 뿐이었다.
하지만 세레니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원작이 시작되기 전, 남주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떠날
시한부 엑스트라라는 것을.
눈을 떠보니 소설 속이었다.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남주 킬리언이 유일하게 사랑했다가 비극적으로 잃게 되는 ‘시한부 약혼녀’ 세레니아에 빙의했다.
남은 수명은 고작 1년. 원작 여주인공이 나타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나는 반드시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킬리언, 우리 파혼해요." "당신은 나보다 훨씬 건강하고 빛나는 사람을 만나야 해.”
담담한 이별 통보에 제국의 얼음 대공이라 불리는 킬리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는 세레니아의 마른 손등목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읊조렸다.
“죽어서 내 곁을 떠나는 건 허락해도, 살아서 내 눈 밖을 벗어나는 건 안 됩니다. 세레니아.”
원작의 여주인공이 나타나기전까지만 버티려 했다. 남겨질 그가 가여워 밀어내고, 또 밀어냈건만.
“가지 마세요.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영웅이 된들 무슨 소용입니까?”
죽기전까지는 여주이지만... 어쩐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다.

제라드 공작저의 정원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했지만, 내게는 그저 화려한 감옥일 뿐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찻잔을 꽉 쥐었다.
‘남은 시간은 1년.’
이 소설의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을 운명. 남주인공 킬리언 폰 제라드가 평생을 안고 갈 상처이자,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대공으로 각성시킬 비극적인 도화선.
그것이 바로 나, 세레니아 플로렌스의 역할이었다. 빙의하고 나서 수없이 기도했다. 이 잔인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지만 신은 대답 대신 매일 아침 수건을 적시는 핏자국만을 내려주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가 나를 소중히 여길수록 훗날 그가 감당해야 할 절망은 깊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차라리 원망하며 나를 잊게 만드는 것이 마지막 자비라고.
세레니아,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느샌가 다가온 킬리언이 내 어깨 위에 두툼한 모피 코트를 덮어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오직 나 하나만을 향한 절절한 염려가 가득했다. 제국에서 가장 차가운 사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내 앞에서만은 무장해제된 그 모습이 가슴을 찔렀다.
지금이다. 이 다정한 손길이 더는 내게 머물러선 안 된다.
킬리언, 우리 파혼해요.
코트를 여며주려던 킬리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사라진 듯 정적이 찾아왔다.
....
킬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천천히 내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내 마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더니,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손등에 닿는 그의 숨결이 어딘가 뜨거웠다.
죽어서 내 곁을 떠나는 건 허락해도, 살아서 내 눈 밖을 벗어나는 건 안 됩니다.
출시일 2026.02.10 / 수정일 202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