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하늘 아래 숲은 축축하게 잠겨 있었고,
바람은 오래된 무덤 사이를 스치며 낮은 숨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시든 꽃잎들이 빗물에 짓눌린 채 흙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산 사람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보다, 죽은 것들이 머무는 침묵 쪽이 훨씬 편안한 남자였다.
멀리 저택에서는 약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샹들리에에 불이 켜지고, 귀족들이 가면 같은 웃음을 띤 채 와인을 들고 있을 시간.
그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과, 원하지도 않는 미래가 천천히 완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검은 코트 자락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빗물이 젖은 흑발 끝을 타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창백한 얼굴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지친 눈빛만이 희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도망칠 수 없는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이렇게 사람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만 겨우 숨을 쉬는 것처럼.
오래된 고목 아래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안의 반지를 내려다봤다.
은빛 반지 표면엔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금속. 사랑보다는 계약에 가까운 물건.
그는 피식 웃었다. 숨이 새어나오는 것 같은, 지친 웃음이었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결혼 서약을 읊기 시작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수백 명 앞에서 반복해야 할 말이었다.
“이 반지를 받아준다면.”
무심한 목소리.
“영원히 함께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
그 순간이었다ㅡ
차가운 감각이 손목을 붙잡았다.
젖은 흙 아래, 창백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순간 숲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가라앉았다.
바람도,
빗소리도,
전부 멀어진 것처럼 조용했다.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흑발을 쓸어 넘기며 어두운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저택에서는 지금쯤 약혼식 준비가 한창일 터였다.
샹들리에 아래 웃고 있는 귀족들, 축복처럼 포장된 계약, 정해진 미래.
숨이 막혔다.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지만 그에게 이 결혼은 아름다운 감옥에 가까웠다.
사랑도 선택도 없이, 가문의 이름 아래 평생을 정해진 역할대로 살아가야 하는 삶.
그는 그런 시선들로부터 도망치듯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결국 오래된 묘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낡고 이름조차 흐려진 무덤들 사이. 그는 가장 가까운 비석 앞에 무심히 기대섰다. 누구의 무덤인지조차 보지 않았다.
손안에는 약혼 반지가 들려 있었다.
은빛 표면 위로 달빛이 반짝였다.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허탈하고 지친 웃음이었다.
그리고 마치 연극 대사를 흉내 내듯, 낮고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 반지를 받아준다면,
빗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그 순간—
무덤 아래에서 무언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젖은 흙 사이로 창백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붙잡아 오는 손.
곧 무덤 위 흙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웨딩드레스와 시든 꽃이 얽힌 섬세한 자수의 베일. 긴 푸른빛 머리칼 아래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분명 죽은 존재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살아 있었다.
떨리고, 불안하고, 간절했다.
여자는 한동안 루시엔을 올려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끝없이 어두운 밤 속에서 겨우 빛 하나를 발견한 사람처럼.
곧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가 건넨 반지에 손가락을 끼웠다.
스윽
너무도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작게 떨리며
"좋아요.." “이번엔… 혼자 두지 않는 거죠?”
루시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숨 돌리기 위한 서약 흉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루시엔은 반지를 빼내려다 멈췄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기 때문이다.ㅡ
꼭 다시 버려질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죽은 존재인데도,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을 밀어내지 못했다.
저택 안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숨 막히던 세계 바깥에서, 죽은 여자의 차가운 손끝만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루시엔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자신이 아주 잘못된 것을 건드렸다는 걸.
그리고 동시에—
이 기묘한 만남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역시.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