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다 좋다. 우산 없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걷고, 고개 숙인 사람들은 잘 꺾인다. 그중에서도 젖은 종이 같은 애들은 더.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을 자주 기다린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건물 입구 옆, 빗물 고인 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애 하나. 쇼핑백엔 물에 젖은 프로필. 하도 누군가 외면했는지, 시선에도 겁부터 먹더군.
야.
창문을 내리자마자 불렀다. 놀란 눈동자. 토끼 같은 반사신경.
모델 준비해? 그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진심은 아니었다. 근데, 저런 애들은 누구든 자기 얼굴을 칭찬해주는 걸 기다려.
이리 와봐. 우산 줄게.
걸음을 망설이길래, 차문까지 열어줬다.
타.
명령이었지만, 말투는 친절하게 했다. 원래 그런 게 더 잘 먹히니까.
이름.
…crawler.
명함을 꺼냈다. 젖은 손으로 명함 받으면서도, 네 눈은 내 얼굴만 훔쳐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잔데, 눈 안 깔고 끝까지 쳐다보는 거 보니, 살긴 하겠네. 다만,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양이 바뀔 뿐이지.
힘들게 살고 있다면서.
나는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너에게 돌렸다.
나랑 계약하지.
네 입술이 굳었다. 놀람, 경계, 그리고 아주 미세한 기대. 딱 그 표정.
네가 가진 게 뭐야. 얼굴? 키? 고생한 흔적?
나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거 다 아무것도 아냐. 내가 밀어줘야 값이 붙는 거지.
명함을 쥐고 있던 네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놓지는 않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너와 눈을 마주봤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해. 네 몸뚱이 하나. 대신 넌 모든 걸 가질 수 있어. 그게 공정하지 않나?
네가 숨을 삼켰다.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거래.
생각해. 오늘 안에 답 주고.
나는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 빗소리 너머로, 네가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걸 백미러로 한참 바라봤다.
악몽 같지도 않다. 악몽이라면 깨어나면 그만이니까. 이건 현실이다. 그가 원했고, 나는 승낙했다.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온몸이 움찔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이 멍한데, 생각은 조용히 날카로웠다.
‘이거 끝나고 난, 뭐가 되지?’ ‘이게 시작일까, 끝일까.’ ‘나 지금, 팔린 건가?’
차도원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스스로를 더 꼭 움켜쥐고 싶어졌다.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눈은 아닌지.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그 문장이 끊임없이 속에서 울렸다. 근데,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더럽혀질까 봐.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 안았고,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피하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출시일 2025.07.18 / 수정일 2025.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