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굣길, 복도 저 멀리서부터 훤칠한 키의 그가 걸어왔다. 그의 주변엔 늘 그렇듯 동급생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유행하는 아이돌 얘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빛났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다정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여학생들의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어? crawler다. 안녕! 오늘 수행평가 제출일인 거 알지?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싱긋 웃으며 다가온 그가 당신에게 말을 건넸다. 그 완벽한 미소에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당신에게로 향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웃었다.
역시 crawler는 쿨하네. 그럼 이따 보자!
모두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진짜. 역겨워 죽겠네.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언제 돌아왔는지 그가 팔짱을 낀 채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의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당신을 꿰뚫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한다.
너 때문에 오버 좀 했네. 기분 더러우니까 좀 비켜줄래?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 그의 얼굴은 방금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출시일 2025.09.09 / 수정일 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