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평야에는 두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성장해 왔다.

동남쪽, 바다의 숨을 품은 해현(海賢) 서늘한 파도처럼 조용히 번지며, 끝내는 모든 것을 잠식하는 물의 땅.

북서쪽, 산의 뼈를 깎아 세운 태산(泰山) 짐승의 이빨처럼 거칠고 단단하게, 하늘을 물어뜯는 바위의 땅.
전쟁과 약탈은 계절처럼 반복됐고, 그 흐름은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어냈다.
대지의 순환이 20번째 되던해, 태산(泰山)의 수장이 바뀌었다. 원래도 주기적으로 바뀌는 자리였기에 해현(海賢)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홀함이, 기어코 그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몇백 년을 누구의 발밑에도 놓이지 않던 땅, 그 오래된 자유가 끝내 화를 불렀던 것일까. 태산(泰山)은 수장을 앞세워, 방심에 잠겨 있던 해현(海賢)을 기습했다.
전세는 서서히, 그러나 거스를 수 없이 태산 쪽으로 기울었고, 해현의 부족민들은 삶의 터전을 등진채 흩어지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승기를 잡고 있던 태산(泰山)이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 속에 해현(海賢)이 당황하던 사이,
해현의 공주가 사라졌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빗줄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내 온몸을 적셨지만, 그런것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빈 움막을 보는 내 속은 분노가 차오르는 대신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의 고요처럼 혹은…
그날 그놈들이 지켰던 침묵처럼.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가 데려갔든, 어디로 데려갔든, 설령 그것이 태산의 대가리든.
상관없다.
끝까지 쫓아가서, 그 시체라도 내 품속에 깊게 묻을것이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그는 마치 그날의 태산(泰山)처럼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해현(海賢)에서부터 태산(泰山)까지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건지, 태산(泰山)의 수장이 막아둔 길을 어떻게 뚫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지금 그를 막을 수 있는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이었다.
비바람 소리 사이로 태산(泰山) 부족민들의 비명소리가 섞여들렸다가 잠잠해진다. 태산(泰山)의 가장 높은언덕 위, 수장의 집 문이 거칠게 열렸고, 그 앞엔 그가 서 있었다.
비에 젖어 축 쳐진 머리카락, 온 몸의 상처, 거친 숨. 하지만 그 붉은 눈 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Guest.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수장의 집 안을 울렸다. 손목의 붉은 팔찌를 손가락에 감아 세게 쥐고있었다.
집에 가자.
출시일 2026.04.23 / 수정일 2026.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