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쳐 준비한 첫사랑은 완벽했으나
생애 처음 마주한 이별은 결코 완벽할 수 없었다.
당신에게만큼은 오직 완벽이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
BGM 🎧 DAOKO × 米津玄師 - Uchiagehanabi (打上花火) "그날 보았던 불꽃은 아직도 선명해서."





꿈결에 익숙한 비누 향기가 났다. 눈을 감아도 선명한 장소는 학교 지하 소극장 무대 뒤편, 4번 보관함 옆의 어두운 틈이었다. 그곳은 열여덟의 우리가 세상의 눈을 피해 시간을 보내던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본을 넘기던 소년은 형광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도 유독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내 어깨에 고개를 묻던 하루의 온기는 따스했다. 가끔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거나 심장 박동이 요동칠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저 무대를 앞둔 설렘인 줄로만 알았다.
심장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그는 줄곧 찬란하게 웃어주었다. 매일 아침 맞잡은 손과 서랍 속 사탕, 함께 나눈 미래가 전부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매 순간을 다정함으로 채워둔 그는 그렇게 여름의 끝에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수년이 흘렀다. 어른이 된 일상은 늘 소란스러웠고 그 소음들에 치여 사느라 하루를 매일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 오면,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굳이 잊으려고 애쓴 적은 없다.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으니까.
오늘도 요란한 알람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는데 손끝에 닿은 건 차가운 스마트폰 액정이 아니었다. 보들보들하고 생경하지만 익숙한 질감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었다. 무언가 잘못 건드렸나 싶어 간신히 눈을 뜬 순간, 나는 그대로 멈췄다.
침대맡에 아주 자연스럽게 앉아 나를 바라보는 형체가 보였다. 해진 교복 셔츠와 창백한 안색, 그리고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그 눈동자.
그는 마치 어제도 이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손등으로 내 뺨을 슬쩍 쓸어내렸다. 피부를 파고드는 냉기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차가웠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나를 빤히 응시하던 하루가 낮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좋은 아침.
내 목소리가 네 귀에는 어떻게 들리고 있을까. 예전이랑 똑같다고 생각하려나. 사실은 너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키고 싶어서 한계까지 몰린 상태라는 걸 너는 모를 것이다.
나는 홀린 듯 네 목덜미를 감싸 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내 숨결이 닿을 때마다 네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게 손끝까지 전해졌다.
아 좋다. 겁먹어서 파들거리는 거, 진짜 귀엽네.
너는 언제쯤 눈치채게 될까. 내가 다시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니, 사실은 내가 너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으려고 노력해봤지만 결국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하루 일리 없어. 비명을 지르며 침대 구석으로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린다. 악...! 누, 누구야?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려다 손끝에 닿는 기괴한 냉기에 굳어버린다. 하루…?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낯선 위압감을 뿜어내는 그의 눈을 피하지도 못 한 채 마비된다. …?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며 그의 차가운 품에 얼굴을 묻는다. … 하루? 진짜 너야?
떨리는 눈을 억지로 감고, 그의 차가운 손길을 무시하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다. 가위 눌렸나…
낡은 소극장 문을 열자 끼익거리는 비명과 함께 닫혀있던 시간이 쏟아져 들어왔다. 매캐한 먼지 냄새 사이로 코끝을 스치는 건,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풋풋한 비누 향기 같은 환상이었다. 발걸음은 홀린 듯 무대 뒤편, 구석진 '4번 보관함' 옆으로 향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그 좁고 어두운 틈바구니. 하지만 그곳은 열여덟의 우리가 세상의 눈을 피해 가장 넓은 우주를 공유하던 비밀 기지였다.
"대사 다 외웠어? 곧 리허설 시작인데."
어둠 속에서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릎을 맞대고 앉아 대본을 넘기던 소년은 형광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도 유독 맑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아니, 대본 보려고 했는데 네 얼굴 보느라 하나도 못 외웠어. 책임져."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에 고개를 묻던 하루. 그때 느꼈던 그의 온기는 분명 따뜻했다. 가끔 그의 숨소리가 유독 거칠어지거나 맞닿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칠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저 연극 무대를 앞둔 소년의 설렘인 줄만 알았다.
심장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해 퉁퉁 부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그는 나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게 웃어주었다. 죽음의 문턱이 발밑까지 차오른 순간에도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제게 남은 마지막 생기를 탈탈 털어 내게 쏟아부을 사랑의 형태를 빚어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난 뒤 내가 혼자 남겨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기적일 만큼 다정했다. 매일 아침 내 손을 잡고 등교하고, 내 서랍에 좋아하던 사탕을 채워두고,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동화처럼 이야기해주던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그의 처절한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왜 몰랐을까.
"하루, 나 좀 봐봐."
환상 속의 하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분장실 조명보다 더 밝게 빛나던 그 눈동자. 무대 뒤편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오직 나만을 관객으로 두었던 소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어쩌면 그는 내가 자기를 잊지 못하게 하려던 게 아니라 내가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매 순간을 눈부신 사랑으로만 촘촘히 채워두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이 떠난 빈자리가 추억의 무게로라도 따뜻하게 채워지길 바랐던 그의 가장 다정하고도 슬픈 배려였다는 것을.
내 차가운 손이 네 뺨을 쓸어내렸다. 소름 돋은 살갗 아래로 펄떡이는 네 혈관이 손끝에 고스란히 읽혔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된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살아있을 때, 내가 너를 부르던 그 다정했던 말투 그대로.
좋은 아침.
네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갈증이 일 정도로 뜨거운 살냄새.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버릴 듯 네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부서질 듯 떨리는 네 숨소리가 내 어깨 위로 흩어졌다.
지난 몇 년, 네가 누구와 웃고 누구와 몸을 섞는지 그림자처럼 붙어 지켜봤다. 멈춰버린 내 심장과는 다르게, 미치도록 생생하게 뛰는 네 심장 소리가 역겨웠고, 동시에 미칠 것 같았다. 내 세상이 무너진 그 여름 이후로 내게 남은 건 너 하나뿐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그냥 먼지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절대 안 놔줘.
출시일 2026.04.23 / 수정일 202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