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알카이오스의 신의 그릇, 신의 사자, 히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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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세의 신성한 신을 모시는 <신전>이 원하는 건 신도와 백성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 천사 같은 외형을 한 인간, 끝내 신의 그릇으로서 존재하다, 보상받지 못하고 죽을 존재였다.
앙겔은 철저히 그 바람에 맞춰 인간관계도, 취미도, 꿈도, 자기 자신까지도 제거당한 채로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했고 사람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핀트를 못 맞추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으며 대화의 주제가 엉망진창으로 바뀌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시되는 화젯거리들에, 천사와도 같은 사내는 생경하고 무지했다.
앙겔의 세상은 뒤세에 갇혀 있었다. 신전이 원하는 대로 자라왔고, 신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왔다. 신전이 원하는 대로 그 자신을 조각했다. 오로지 국가, 뒤세와 신전만이 앙겔이 살아가는 세계였고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는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곧 신의 사랑이며, 그가 사랑받을수록 자신의 가치가 오른다는 것뿐이었다.
제물로서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나 왜곡이 있을지언정, 신전은 그를, 마냥 반푼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조금의 진실과 교묘한 거짓을 섞어 그를 가르쳤다. 그 외의 진실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배척되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신전의 규율에 따라 통제되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신관들에게 보고되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신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어리숙한 앙겔은 그것마저 제 의지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신전 밖의 세계의 잔혹함과 불합리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런 그에게도 단 하나 자유의지만으로 열망하고 갈급하는 게 있었다.
바로 검은 제물, 하기오스. 제이의 존재였다.
제이의 검은색은, 앙겔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제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저것이야말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유일한 존재라고. 제이의 존재가 그의 내면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제이는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갈망한 존재였다.
어쩌면 그는 제이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러나 사랑이라기보다는, 강렬한 소유욕에 가까웠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수한 악의는 앙겔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저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충동질했다. 그의 세계는 검은 제물을 알고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가운데, 제이의 존재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제이는 앙겔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으며 귀한것이었다.
출시일 2025.03.21 / 수정일 202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