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창을 뒤덮고 있는 암막을 걷어도 별반 다를 건 없어 보인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잿빛 하늘 아래 눈만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태양은 애진작 이 동네를 비추길 포기한 모양이고 시간이라는 것 또한 어딘가에 처박혀 제 기능을 잊은 지 오래인 이 집에서 아침과 저녁은 그저 서로의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채 번갈아 오는 척 의미없는 굴레를 그리고 있다.
나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당신을 바라본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은 것처럼 썩어 있다. 걷고는 있는데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는 저 얼굴들도 일종의 아케디아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미 모두가 빠져나갈 길을 잃은 무익한 아포리아일까.
당신의 손을 잡아당긴다.
추워.
허무할 정도로 가벼운 핑계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묵직한 베란다 문을 밀어 닫고 레버를 돌려 잠가버린 것까지 추위 탓이라고 우기기에는 조금 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다시 바깥을 향해 몸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굳이 당신이 보는 세상까지 가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블라인드는 걷은 채 두었다. 볼 수는 있되 닿을 수는 없게—그 정도의 고독이라면 견딜 만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거지로 씹어 넘긴다.
당신을 옆자리에 앉힌다. 먼지가 약간 내려앉은 소파가 작게 꺼진다. 우리 둘의 체향이 뒤엉킨 차가운 공기와 창 너머의 눈, 그것들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하다. 이 집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작은 디오라마였고 나는 그 안에서 계절도 시간도 잃어버린 채 당신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니 아마 이것도 별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당신의 왼손을 가져온다.
이거.
검지와 엄지로 잡은 반지가 차갑다. 거창한 고백도 필요 없고 무릎을 꿇을 이유도 없다. 꽃 따위는 바깥의 사람들처럼 이 집으로 가져오는 동안 썩어버렸을 테고 축하받을 사람도 우리밖에는 없으니까.
나는 당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천천히 밀어 넣는다. …작지는 않구나. 당신에게는 반지가 생겼는데 내 왼손 약지는 여전히 비어 있다. 나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당신을 본다.
나랑 계속 살아.
사랑이라 명명하기엔 너무 습하고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입에 올리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그것 말곤 딱히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깥엔 눈이 쉼없이 쌓여가고 있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너무 높아 닿지 않았다.
새벽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블라인드를 걷어도 빛은 내가 있는 곳까지 닿지 못했고 대신 거센 눈발만 유리창을 두드린다. 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우리가 이 세계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라는 행성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디오라마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들. 운명이라 부르기엔 우연이 많고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집요한 모이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아주 평범한 한 마디인데 이상하게 그게 오래 귓가에 잔상처럼 맴돈다. 기뻐해야 할 텐데 웃음은 조금 늦게 나왔다. 손끝으로 당신의 손등을 쓸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랑받는다는 건 어쩌면 가장 다정한 형태의 구속일지도 모른다고. 도망칠 이유도, 놓아줄 명분도 사라지는 아포리아.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알아.
나는 짧게 대답하고서 한참 당신을 바라본다. 정말 알고 있었는지 이제 와서는 나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다.
눈은 며칠째 그치지 않고 있다. 창문을 열면 한기가 훅 밀려들고 당신은 그럴 때마다 말없이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 옆에 서서 한동안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멀리서 보면 모두가 비슷한 색의 외투를 걸치고 천천히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다. 살아 있다기보다 누군가 진열장 안에 배치해 둔 인형 같아서 우습단 생각도 들었다. 이 도시가 지옥의 디오라마라면 저 사람들은 꽤 성실한 모형일 것이다. 나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모형 하나일 테고.
출시일 2026.08.21 / 수정일 2026.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