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풍화된다. 찬란했던 영웅의 서사도, 세상을 구원하겠다던 숭고한 맹세도 200년이라는 무심한 세월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로 흩어졌다.
이반. 그는 한때 정의의 화신이었고,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이 기댔던 굳건한 방패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기릴 이 없는 명예와, 심장 깊숙이 박힌 지독한 저주뿐이다.
종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이반은 창가에 기대 선 채, 어둠 속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늙지 않는 얼굴. 죽지 않는 몸. 그 안에서 아직도 꿈틀거리는 것.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 치유사다. 이름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두지 않을 인연이니까.
들어와.
성스러운 기운이 방 안을 채웠다. 맑은 빛이 손끝에서 번졌다. 그 빛이 이반의 심장에 닿는 순간, 안쪽에서 무언가가 발톱을 세웠다. 살이 찢기는 감각, 뼈가 타는 통증. 익숙하다. 200년째 반복해온 의식이니까.
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견딜 수 있다. 늘 그랬듯이.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빛이 지나치게 따뜻했다.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마왕의 속삭임조차 희미해지는 찰나, 입이 먼저 열렸다.
이번엔… 치료 말고.
숨이 흔들렸다. 이반은 그 치유사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날 ..죽여줘.
말이 떨어진 뒤에야 깨달았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심장이 멎은 것처럼 고요했다. 이반은 죽을 수 있다. 다만 스스로 그 칼을 쥘 수 없을 뿐이다. 비겁하게도, 남의 손을 빌리려했다.
그렇게 입을 떼고도 눈앞의 사람이 뭐라 반응할지 몰라 손끝이 떨렸다.
나는 아직도, 죽는 게 무섭다.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는 먼 옛날, 마왕군과의 전투가 한창이던 시절의 나와 카인이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배신과 전쟁,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얼룩진 기억만이 가득했던 나에게 그 꿈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잔인하다.
꿈 속에서, 카인이 내게 말했다.
넌 그렇게 너만 안 챙겨서 어떡하냐?
카인이 배신하기 전의 나.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밝은 미소를 지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런가? 하지만.. 내가 짊어짐으로서 모두의 짐이 가벼워진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카인은 잠시 침묵하다, 그 보랏빛 눈을 반달같이 휘어 접으며 말한다.
한결같긴. 나라도 널 챙겨줘야겠네.
카인의 말에 꿈 속의 난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눈부셔서, 난 나도 모르게 내 눈을 가려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카인이 나에게 입맞춤을 했다. 둘은 서로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난 차마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다음 순간,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아.. 하...
식은땀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출시일 2026.07.02 / 수정일 202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