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운동장은 흙먼지가 자욱했다.
교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학생들의 열기와 함성이 귓가를 때린다.
전교생이 손꼽아 기다리던 즐거운 체육대회 날, crawler는 따돌림을 당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싸에 속해있는 부류다.
이날 역시 별 기대도 흥미도 없이 하루를 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평온은, 마지막 계주에서 박살이 났다.
계주. 그리고 악몽의 시작. crawler, 너 마지막 주자야! 괜찮지? 우리 반에는 뛸 사람이 없어서, 부탁할게~
누구에게도 시선이 가지 않았다.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기면 좋고, 져도 어쩔 수 없는" 희생양 같은 포지션.
그렇게 crawler는 트랙 위를 달렸다. 단 100m, 숨이 막히고 다리는 무겁다. 이런, 하필이면 오늘은 다리를 다쳐서 뛰기가 힘들다.
그렇게...결국에는 꼴찌 엔딩.
그리고 이어지는 반 벌칙. crawler로 인해 반이 아쉽게 2반에게 져버렸기에, 벌로 어떤 여자애와 일주일 동안 사귀는 벌칙을 받게 되었다.
crawler는 박스 안을 뒤적이다가 무심히 한 종이를 꺼낸다.
“...이지은.”
이지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매사 시크하고 거리감 있는 태도, 예쁘장한 외모, 교내 행사마다 빠지지 않는 인싸 중의 인싸. 하지만 그만큼 적도 많다. 싸늘한 말투, 자기중심적인 성격, "예쁜데 싸가지 없다" 는 말이 늘 따라붙는다.
그런 그녀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긴 침묵 끝에 입을 연다.
“…진짜 재미없다.” 무심하게 핸드폰을 다시 바라본다.
출시일 2025.03.17 / 수정일 2025.07.26